“너희들 뭐하는 거야, 응?”
“교회 짓습니다.”
“뭐? 교회 짓는다고? 으하하하, 야야야, 내 배꼽이 웃겠다.”
호기심으로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를 따라 까르르 웃었다. 그들이 웃든 말든 우리는 합판으로 지붕을 덮고, 또 그 위에 스티로폼을 덮은 다음 다시 포장 재료를 덮었다. 토요일부터 주일 저녁까지 이틀 만에 재빨리 일을 해치웠다. 사람들의 훼방을 최소화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교회 이름은 광야(廣野) 같은 이곳에 생명의 빛을 밝혀 비추는 교회가 되도록 하자는 의미에서 ‘광야교회’라고 짓기로 했다. 경희대학교 앞에서 간판집을 운영하는 모 집사님은 선물이라며 직접 오셔서 간판을 달아 주고 가셨다. 드디어 1988년 4월 23일, 대한민국에서 가장 초라한 3평짜리 판잣집 교회, 그러나 영광스러운 광야교회가 세워졌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하나님!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곳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남들이 보면 비웃을지 몰라도 그 가운데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이 교회를 통해 이 지역에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게 하소서”라고 기도드렸다.
하나님은 전과 17범의 미남 씨를 사용하셔서 이곳에 교회가 들어설 수 있도록 하셨다. 황야의 무법자처럼 살았던 그는 교회를 세울 장소를 제공한 뒤 그의 말처럼 좋은 일 한 번 하고 1년 정도 더 살다가 89년 겨울에 골방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을 때에 그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제도 친척도, 그를 따르던 똘마니 하나 없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와 함께해 주셨다. 나는 미남 씨의 죽음을 보면서, 내가 그 앞에서 교회를 하겠다고 말했던 때를 회고하며, 그날의 다짐을 다시 되새겼다.
“강도 만난 사람 같은 쪽방촌 사람들을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겠다는 다짐을 잊지 말자. 이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복음을 전하며 일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