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할아버지는 일제시대에도 신앙생활을 계속하셨다. 특히 일제 말기에는 집집마다 있는 구리그릇이나 숟가락, 젓가락 등 쇠붙이는 모조리 거두어가는 공출 태풍이 전국을 휘몰아쳤는데, 그때 외할아버지는 온통 구천교회의 무쇠 종을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저 종을 공출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
외할아버지는 궁리 끝에 종을 감추기로 결정하신 후, 종을 끌어내려 지게에 지고 마을 뒷밭에 묻으셨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았다. 마을의 친일파가 고발하는 바람에, 다시 그 종을 남몰래 모래사장에 숨기셔야 했다.
삼손 같은 장사도 아닌데, 어떻게 종을 끌어내려 지게에 지고 마을까지 가셨을까? 최근에도 구천교회에 가서 그 종을 바라보며 외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일본이 망한 후, 외할아버지는 종을 다시 종탑에 달아놓으시고는 매일 새벽 5시에 종을 치셨다. 당시 교인 중에 시계 있는 사람이 없어서, 외할아버지는 4km 떨어진 안계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구천교회 종을 치셨다.
외할아버지는 추운 겨울에도 변함없이 종을 치셨다. 시간에 맞춰 종을 치기 위해 새벽 일찍 언덕에 올라, 푹 파인 구덩이에 거적을 덮고 쪼그려 앉으셔서 안계교회 종이 울리기를 기다리셨다. 10리 밖에서 종이 울리면, 외할아버지는 곧바로 구천교회 종끈을 잡아당기셨다. 댕그랑, 댕그랑, 댕그랑!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에 영적으로 부요했다. 주일이 되면, 양가 모두 교회에 갈 준비로 바빴다. 친할머니는 밥을 많이 하셔서 소쿠리에 이고 교회로 가셨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밭에서 채소를 따다 깨끗이 씻어 된장을 준비하셨다.
예배가 끝나면 구천교회 교인 모두 친가와 외가에서 준비해 온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정겨운 교제를 나누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