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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수수께끼를 내겠다. 개구리 세 마리가 통나무 위에 앉아 있다. 그중 두 마리는 뛰어내리기로 결정한다. 그러면 통나무 위에는 몇 마리가 남는가? 초등학생도 알 정도로 쉬운 문제다. 셋에서 둘을 빼면 하나 아닌가? 그러나 틀렸다. 둘이서 뛰어내리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아직 통나무 위에 있다는 말이다. 행동으로 옮겨서 뛰어내린 것이 아니다. 실제로 뛰어내리기 전까지, 개구리는 여전히 통나무 위에 앉아 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상태는 어떠한가? 뛰어내리기로 결정했는가, 아니면 실제로 뛰어내렸는가?
이 수수께끼는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맺는 방식을 아주 잘 묘사해 준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기 원한다. 자신에게 그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알고 용서받기 원한다. 어쩌면 이전부터 ‘뛰어내리기로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뛰어내리기 전까지는, 여전히 통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하면 여전히 잃어버린 자들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다.
2천 년 전 본디오 빌라도는 군중에게 물었다. “너희는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기 원하느냐?” 군중은 눈이 벌개져서 소리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빌라도는 결정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던졌지만, 결코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각자 개인적으로 예수를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호기심이 당신을 진리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끝없는 논쟁은 진리를 회피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결국 진리는 개인의 책임을 요한다. 당신은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토론할 수 있고, 논쟁할 수 있고, 비평할 수 있지만, 마지막에는 그것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