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우은진 기자
쌓인 눈 사이로 살짝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한 어느 겨울날 과천에 있는 김병종 화가의 화실을 찾았다. 화실의 문을 열자마자 빨간색과 녹색의 크고 작은 그림들로 가득 찬 화실 속에서 물감으로 뒤범벅이 된 작업복 바지를 입은 김병종 화가가 사람 좋은 미소로 반긴다.
처음 들어가 본 화실의 낯섦과 호기심은 <화첩기행> 화가로 알려진 그의 특이한 그림들 속에 머문다. 동양화가치곤 색다른 그림들이다. 점잖아 보이는 화가의 외모와 달리, 빨간 꽃은 열정이, 녹색 나무는 강인한 생명이, 살구색 바탕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묻어난다.
미술계에서는 드물게 문(文)과 화(畵) 둘 다 능해 그림을 모아 엮은 책 <화첩기행>으로 유명한 서울대 미대 김병종 화가(할렐루야교회 안수집사). 그는 글과 그림뿐 아니라 언변에도 능했다. 오랜 세월 한 우물을 파며 경지에 오르게 된 화가의 삶과 기독교 신앙이 어떤 조화를 이루었는지, 생명 화첩에 둘러싸인 채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머니의 낙관적 신앙의 영향
예술가적 재능은 타고났는가 아니면 노력해서 얻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신은 타고난 것 같다고 말하는 김병종 화가. 어린 시절부터 학교 내 문예시상식 상이란 상은 모두 싹쓸이할 정도였고, 끊임없이 뭔가 쓰거나 그렸다고 한다. 그에게 그림은 어둠 속에서 술 마시며 방황하며 찾은 예술혼도, 자기 도피처도 아니었다. 그에게 그림은 유년 시절의 유쾌한 추억이자 한없는 그리움의 투영이었다.
첫 시리즈물로 포문을 연 <바보 예수>는 어머니의 히브리적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생명의 노래>는 어린 시절 고향 남원 이곳저곳에서 뛰놀던 대자연의 추억이 가득 묻어났으며, <화첩기행>은 그에게 축적된 지적 감수성이 예술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 것이다.
인생을 통틀어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어머니의 항상 밝고 긍정적인 신앙이었다. 어머니의 신앙은 지금 생각해도 그에게 뭉클함을 안겨 주는 동시에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작고한 아버지 대신, 늘 어려운 가정경제를 책임졌던 어머니는 2남 3녀를 키우며 한 번도 푸념이나 비관,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정을 막강한 누군가가 뒤에서 봐주고 있는 줄 착각했다. 그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여유롭고, 유머를 지녔으며, 어려운 중에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뒤에서 돕는 막강한 재력가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다. 지금도 어린아이 키만큼 쌓인 어머니의 낡은 성경책 유품들을 보면 그 철저한 삶에 경외감이 들 정도다.
그는 마치 어머니가 가정교회 목자처럼 온 가족에게 따뜻한 카리스마로 제자훈련을 하셨다면서 말씀과 삶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일치되게 사셨기에 늘 존경스러웠다고 말한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낙천적이며 훈훈한 인품을 지녔던 어머니의 영향 때문에 그의 그림 역시 따뜻하고 긍정적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2남 3녀 형제들은 모두 장로, 권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명절날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다가도 모두 새벽기도에 나갈 만큼 철저한 기독교 신앙을 소유한 형제들과 달리, 자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머니의 기도제목이었다고 한다. 겉으로는 얌전한데, 예술가적 기질 때문에 청년기 시절 지적 방황을 하는 아들이 끝내 못 미더웠던 것이다.
시대적 고민이 <바보 예수>로 투영
서울대 회화과에 지원한 그는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갖고, 미술은 취미로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1970년대 초 사회 상황으로는 충분히 납득이 갔다. 그러나 어머니만큼은 미술을 해보라며 격려해 주었다. 어머니의 긍정적 에너지는 그의 그림 스타일에도 밝고 따뜻한 미적 분위기를 풍기게 했다.
한편, 아버지의 부재로 그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살다시피 했다. 공터에서 놀 때 다른 아이들은 어머니가 “아빠 오셨다, 어서 빨리 들어와라” 하고 부르는데, 그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 친아버지처럼 그가 의지했던 분이 하나님이셨고, 그분은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그래서였을까? 1980년대 암울했던 사회 현실 속에서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한 그는 <바보 예수> 시리즈를 발표한다. 당시 대학가는 연일 최루탄이 난무했고, 대치된 증오는 최루탄보다 매웠다. 그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2천 년 전 유대 광야를 걸어간 예수를 떠올렸다. 그에게 예수는 허약한 빌라도 정권을 무너뜨리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에게 예수는 자기희생과 사랑으로 바보처럼 십자가를 짊어지신 분이었다. 그는 기존 예술작품에서 미끈한 팔등신에 백인 미남으로 예수가 장식되는 데 거부감을 느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 속에 의지했던 분이었고, 당시 시대 상황에서 남몰래 흘린 가슴속 깊은 눈물을 이해하셨던 분이었기에 그에게 예수는 친근한 이미지였다.
그의 <바보 예수>와 <흑색 예수> 연작을 보고 전통 문인화 입장에서는 동양화로 뜬금없이 웬 예수냐고 시비를 걸었고, 몇몇 기독교인은 신성모독 아니냐며 비난을 했다. 이래저래 화단에서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바보 예수> 연작의 개인전은 서울을 출발해 독일, 헝가리, 폴란드 갤러리로 숨가쁘게 돌았고, 그의 이름 석 자 앞에 어느덧 <바보 예수> 작가 타이틀이 붙었다. 그의 80년대는 <바보 예수>로 시작해 <바보 예수>로 끝났지만, 생명에 관한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생명의 노래>와 <화첩기행> 시리즈
그는 <바보 예수> 전시 이후, 1989년 신림동 고시촌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돼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병상에 있으면서 그는 생명의 신비함과 고결함에 눈뜨게 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미술관임을 깨달았다. 병원 주변 일대에 마치 번호표를 준 것처럼 겨울 땅을 밀고 나오는 연두색 새싹과 꽃, 즉 생명의 힘에 감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퇴원 이후 그는 생명을 가진 것들을 그려 봐야겠다고 결심하고, 1990년 첫봄 온전치 못한 몸을 이끌고 들로 산으로 숲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온 천지에 흐르는 생명의 기운을 느꼈다. 꽃과 나무, 아이와 학, 물고기와 새가 서로 다정하게 바라보면서 생명의 기쁨을 나누는 <생명의 노래> 연작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의 화풍에서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린 닥종이를 부조처럼 그림 위에 붙여 채색을 한 것이나 힘찬 붓선이나 황토 배경 등은 모두 이 땅의 강렬한 생명의 기운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고구려 벽화나 문인화, 민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가 그림 안으로 투영되어 다시 관심을 모았다.
바로 <화첩기행> 시리즈 1,2,3의 탄생이 그 결정체다. 화첩(畵帖)은 그림을 모아 엮은 책으로, 우리나라 예술가들에 대한 그만의 해박한 지식이 특유의 유려한 글 솜씨로 풀어졌다. 이미 대학 시절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고, 대한민국 문학상까지 받을 정도로 탁월한 글 솜씨를 지닌 그는 그림과 글이 자신에게는 밥과 반찬과 같다며, 그림을 보면 자연스럽게 스케치하듯 글이 술술 써진다고 고백한다. 실로 행복한 은사를 지닌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첩기행> 1은 ‘예의 길을 가다’라는 부제를 달고 최승희, 김용준, 윤이상 등 역사에 묻혔던 우리 예술가들을 새롭게 되살려 냈고, <화첩기행> 2는 ‘달이 뜬다 북을 울려라’라는 부제를 달고 박수근, 김승옥, 천상병, 채만식, 김유정 등 문인들에게서 느낀 감성을 그림으로 표현해 냈다. <화첩기행> 3은 ‘고향을 어찌 잊으리’라는 부제를 달고, 독일, 프랑스, 중국, 일본 등 세계 각지를 몸소 누비며 뒤쫓은 우리 예인들의 행적을 담았다. 이렇듯 <화첩기행>은 단순한 기행문을 넘어서는 진한 감동을 전하는데, 아마도 우리 예술가들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과 존경이 녹아 있기 때문이리라.
계속되는 <라틴 화첩기행>, 그리고 Heaven
그는 우리나라 예술가들의 그림을 그리는 데 머물지 않았다. 즉 이곳이 아닌 저곳들을 여행하고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북유럽, 지중해 연안의 이름 모를 섬과 강, 사람들을 만나고 그렸다. 그렇게 해서 2008년 <라틴 화첩기행>이 탄생했다.
남미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하는 색의 오묘함과 신비함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고 쿠바로 간 그는 그곳에서 가난하지만 음악과 생명력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 반했고, 프리다 칼로의 고통의 예술을 느낀 멕시코, 춤의 나라 브라질 등 라틴의 열정을 그만의 화법과 글로 숨차게 이끌어 냈다. 그는 산업화가 더디게 일어난 나라에서 또 다른 생명력을 발견했다며, 앞으로 <아프리카 화첩기행> 등을 계속 출판할 예정이라고 밝힌다.
그에게 기독교 신앙과 예술이 충돌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오히려 신앙이 자신의 그림에 풍부한 창조성을 부여해 준다고 말한다. 신앙은 그림이 막힐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고 도와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예술로 모방하고 재창조하며 그의 상상력은 배가되었다. 유가철학의 박사학위를 지닌 그가 앞으로 그리고 싶은 주제는 “Heaven”이다. 전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가 던진 질문은 ‘그럼 과연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이다.
“어떤 풍경은 ‘아’ 하는 감탄이 나오고, 또 어떤 풍경은 ‘오’ 하는 감탄이 나오는데, 정말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로 아찔한 풍경은 ‘악’ 소리가 나옵니다. 새벽 히말라야 설산이 주황빛으로 물들면서 해 돋는 순간이나 쿠바의 바다 풍경, 네팔과 알제리의 다채로운 풍경 등이 ‘악’ 했던 곳입니다. 아마 천국이란 결국 ‘악’ 소리의 연속이 아니겠습니까? 천국의 예표로 지상에 숨겨진 그 절대 아름다움을 색채의 순례자로서 그려 보고 싶은 것이 소망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신앙이 어머니를 못 따라가고 어그러질 때가 많았지만,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창 22:14) 하신 것처럼 여호와께서 이미 준비해 주신 삶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말하며 붓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