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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1864~19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1905년, 을사조약으로 우리 민족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의 빛을 통해 우리 민족을 깨우기 시작하셨고, 기독교 민족 운동가들이 민족의 계몽과 각성을 위해 헌신하도록 일하셨다. 그중 남강 이승훈은 1907년 민족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평생 민족계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게 처음부터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11살 때부터 상점의 사환으로 일했다. 성실함과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20대에 사업가로 크게 성공하여 자수성가한 그는,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돈을 주고 벼슬을 사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고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된 것은 도산 안창호와의 만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이후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서 3·1 운동을 이끌다 체포됐을 때도, 일본이 조작한 안명근 사건과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또다시 감옥에 갇혀 고문을 받을 때도 그는 당당히 신앙을 고백했다. 언제나 그를 붙잡아 준 것은 말씀과 기도, 그리고 분명한 사명감이었다.
“내가 오늘까지 온 것은, 내가 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본래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이끄셔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조선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널리 믿어야 하고, 단지 기도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남강 이승훈. 이러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그의 교육철학과,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그의 삶은 수많은 열매를 맺으며 후대로 이어졌다.
시인 김소월, 의사 백인제, 화가 이중섭, 역사학자 함석헌 그리고 주기철, 한경직 목사까지 한국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이들 모두 오산학교 출신이었다. 이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좇아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으며, 소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