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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2월

“첫째도 순교, 둘째도 순교, 셋째도 순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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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1902~195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는 인민군에게 붙들려 맨발로 자갈밭을 걷고 있었다. 연합군에 의해 수도 서울이 탈환된 그날은 6·25 전쟁을 일으킨 인민군이 후퇴하는 때였고, 그들은 그 후퇴 길에 자신들의 사상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총살할 계획이었다. 특정 사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했기에 붙잡혀 갔던 손 목사는 죽으러 가는 그 자갈밭 위에서 목청껏 외쳤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몇 시간 후, “첫째도 순교, 둘째도 순교, 셋째도 순교”라던 그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다.
전 재산을 모두 교회 건축을 위해 내놓을 만큼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일곱 살때부터 새벽기도를 다녔던 손양원 목사. 그는 일제 치하였던 보통학교 시절, 신사참배를 거부해 퇴학당할 뻔 했을 만큼 굳건한 믿음을 가진 소년이었다.
이후 25세의 나이에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한 손 목사는 그곳에서 주기철 목사를 스승으로 만나게 된다. 그로부터 순교자 정신, 즉 말씀과 삶의 일치로 매순간 순교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그는 자신도 충성되게 순교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졸업 후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다 1939년, 전남 여수의 대규모 나병 환자 수용소 ‘애양원’과 더불어 있던 애양원교회로 부임하게 된다.
손 목사는 애양원에서 나병 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며 간호할 만큼 그들을 사랑했고,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았던 환자들은 그의 사랑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충성할 것을 강조했던 손 목사는 일제 치하라는 시대적 상황 가운데에서도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했고, 결국 6년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뒤이어 광복 후 출소한 그에게 ‘여순사건’으로 인해 두 아들을 잃는 고통까지 찾아온다. 하지만 손 목사는 두 아들을 순교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단순한 용서를 넘어선 깊은 사랑을 베풀었다.
세상 모든 이가 기피하던 나병 환자들을 사랑하며 헌신하고,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으로 용서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충성하다가 순교한 손양원 목사. 그는 그의 다짐처럼 충성되게 순교의 삶을 살다간 사랑의 순교자였다.


<유민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