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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예수를 따라서 일사각오一死覺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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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기철 목사(1897~1944)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 11:16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1907년에 조선 전체를 뒤흔든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교회는 곧 시험대에 올랐다. 1910년 일본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후 교회는 압력을 받게 되었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 감시와 탄압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런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의 정조를 지킨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주기철 목사이다. 주기철 목사는 모교에 강사로 초청받았을 때, 요한복음 11장 16절을 본문으로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예수를 환영하던 한때는 사라지고, 수난의 때는 박도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설교대로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다.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던 주기철 목사. 춘원 이광수의 강연을 들은 것을 계기로 그는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고당 조만식 등으로부터 굳건한 민족정신과 철저한 신앙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신실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가던 그는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면서 순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교회 안과 밖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일본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를 구속하여 잔혹한 고문과 협박을 가했다. 하지만 그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매수된 목사들이 총회에서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기철 목사가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파면됐고, 가족들은 쫓겨났으며, 평양 산정현교회는 폐쇄됐다.
주기철 목사는 일사각오로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6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감옥에서 고통을 겪던 소양 주기철 목사는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교하여 하나님 품에 안겼다.


<박시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