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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월호 보기 장다나(영화 평론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수남(이정현)은 행복한 삶을 꿈꾸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여성이다. 한때 부기, 타자, 주산 등 14개나 되는 자격증을 따며 주목받기도 했지만 컴퓨터 시대가 도래하며 그간의 노력은 모두 헛수고가 된다. 오로지 성실함을 무기로 노동 현장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지만 오히려 지키고 싶었던 행복마저 저 멀리 사라져가자, 그녀는 특단의 결심을 하게 된다.
모 방송사 프로그램인 <생활의 달인>에서 소재를 찾은 안국진 감독은 달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만두고 싶다”라는 한 출연자의 고백에서 이율배반적인 삶의 현장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는 성실함과 순수한 노동의 결과가 행복과 안위가 아닌, 결코 끝나지 않는 힘든 삶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제목의 테두리를 가져 온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성실’이라는 덕목을 앞세워 그에 따르는 희망마저 묵살해 버리는 ‘이상한’ 한국 사회를 은유한다.
주인공 수남은 성실 그 자체의 캐릭터다. 그러나 죽도록 일해 높은 경지에 올라도 그녀가 보여 준 성실함은 그 땀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감독은 이런 세상에서 수남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성실’이 아닌 ‘실성’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수남의 성실한 땀의 결과를 끔찍한 흉기로 둔갑시켜 성실함을 위협하는 사회를 향하게 한다. 다리미, 마포걸레, 세탁기 같은 생활 속 친숙한 것들뿐만 아니라 전단지 돌리기나 신문 배달, 주방일처럼 살아가기 위해 습득한 기술들은 수남의 손에서 공포의 도구로 변한다.
이것이 오히려 지금까지 성실함으로는 가질 수 없었던 행복에 다가가게 하는 아이러니를 낳게 되고, 그 중심에서 수남은 희망이라는 이름에 홀려 열악한 공장과 재개발 단지 같은 기괴한 한국 사회의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돈다.
어쩌면 ‘성실함’이란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미명하에 약자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물질만능주의 세계가 만들어낸 치밀한 계산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퇴색한 성실함의 의미를 씁쓸하게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