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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1월

가난한 마음이 누리는 복

과월호 보기 박일아(영화 평론가)

영화 프로듀서였던 찬실(강말금)은 새로운 작품의 촬영을 앞두고 감독이 급사를 하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다. 찬실은 한 명의 감독과만 작업했던 경력 탓에 불러 주는 사람이 없어, 가파른 언덕 위의 쪽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리고 친하게 지내던 배우 소피(윤승아)의 가사 도우미를 하며 생계를 이어 간다. 

어느 날, 소피에게 불어를 가르치고 있는 단편 영화 감독 김영(배유람)을 만나고, 찬실은 영화인이라는 동질감에 그에 대한 호감을 키워 간다. 꿈에 나타난 김영에게 자신을 안아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은, 그녀가 불안과 외로움을 얼마나 깊이 마주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이름에서 ‘Young’(젊음)을 떠올리게 하는 영은 찬실이 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지 상기시킨다.

달동네에 위치한 하숙집은 찬실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공간이다. 이제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하숙집 할머니(윤여정)가 처음으로 쓴 한 줄짜리 시에는 인생의 진리가 담겨 있다. 찬실 아버지가 진심을 담아 쓴 편지도 이 집에 도착한다. 때때로 느닷없이 나타나는 홍콩 배우 장국영(김영민)의 환영은 찬실에게 질문을 던지고, 찬실은 이 질문에 답하며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이 마흔.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자식도 없는 마흔의 찬실에게 김초희 감독은 ‘복도 많다’라고 제목을 붙였다. 찬실의 삶을 통해 관객은 성취와 성공만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의 조건이 아니듯,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는 것이 꼭 불행한 것은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녀는 젊은 시절의 패기와 열정이 모두 부정당하는 암담한 순간에도, 자신 앞에 찾아온 외로움과 허무함을 과장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찬실이 담백하고 진솔한 태도로 절망을 마주할 때, 오히려 그녀의 진가가 드러난다. 소유한 것은 없어도 노동을 통해 돈을 벌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떳떳한 신념으로 살아가는 찬실에게서 오히려 빛이 난다. 

살다 보면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어두운 시기, 함께 걸어 주겠노라고 찾아오는 친구와 동료들이 있기에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 영화를 보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