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2007년 02월

프리 허그 운동이 내게 남긴 것

과월호 보기 송도숙(『좋은 생각』 편집팀장)

후안 만의 <프리 헉스>(Free Hugs, 안아주기) 동영상을 보기도 전에, 명동 한복판에서 프리 허거(Free Huger, 안아주기 운동 참가자)와 마주친 적이 있다. “공짜로 안아 드립니다”라는 푯말을 들고 ‘멀뚱멀뚱’ 서성이는 사람을 나는 ‘힐끗’ 쳐다보고 지나쳤다. 인터넷에서 포옹 운운하며 야단법석일 때도 잠깐 스쳐 가는 모방 또는 유행이겠거니 했다.

 

그러다 한 방송 프로그램을 계기로 후안 만의 동영상,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숱한 프리 허거의 동영상을 직접 보았다. 그런데 글쎄,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환한 얼굴로 달려와 안기는 사람과 따뜻한 얼굴로 힘껏 팔을 벌려 안아 주는 사람이라…. 그건 성경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렸던 어떤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두 팔 벌린 예수님께 달려가 안기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속에 담긴 사랑과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프리 허그 운동은 낯선 사람이라도 편안하게 서로 안아 주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작년 9월, 미국 동영상 전문 사이트에 올려진 한 동영상을 계기로 지금은 전 세계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들을 포옹하는 한 청년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은 불과  석달 만에 7백만 명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 덕분에 유명해진 동영상의 주인공 후안 만.

호주의 평범한 청년인 그는 이미 2년 반 전부터 안아주기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실의에 빠져 시드니 거리를 방황하던 그를 낯선 아주머니가 안아 준 것이 계기라고 한다. 그 품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고, 포옹이 생각보다 큰 힘을 갖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둘러보니 그 도시 사람들이 아무도 행복해 보이지 않더란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은 것이 무얼까’를 고민하다 결국 “Free Hugs”라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지친 사람들을 안아 주기 위해서였다. 그들도 자신처럼 위로를 얻기를 간절히 바라며.

“처음 시작하고 15분 동안은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어요. 너무 무서웠죠. 사람들은 나를 비웃으며, 가던 길을 계속 가기만 했어요. 그러다 갑자기 어떤 조그마한 체구의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나를 안았어요. 그리고 바로 1년 전 그날, 자신의 딸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야기해 주었죠.”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을 안아 주었다. 단 한 번의 포옹으로 사람들은 미소를 되찾았다. 사람들을 안아 주기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그가 위로를 얻고 행복을 되찾았다.

놀라운 일이 이어졌다. 그의 동영상을 보고 위로를 얻은 사람들이 안아주기 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미국, 브라질, 폴란드, 중국 등 언어도 문화도 다른 곳에서 이 운동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0월, 한국에서도 시작되었다. 서울 명동에서 처음 이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의 문화적 한계를 운운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한계라는 것이 조금씩 무너졌다. 여전히 서먹하고 쑥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지만, 위로의 불씨는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져 지금은 서울뿐 아니라 부산, 대구, 대전, 인천 등 주요도시 곳곳에서 안아주기 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동시에 포옹의 의학적, 심리적 효과가 부각되었다. 안아 주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한다. 포옹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나누는 상징적인 몸짓을 넘어 생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유익한 행위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연구팀에 따르면, 포옹을 할 때 사람은 혈압이 낮아지고 심장박동이 안정되며 스트레스 호르몬도 적게 분비된다고 한다. 포옹이 사람에게 안락감을 주고 스트레스를 완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옹 치료 프로그램을 도입한 의료기관도 있다. 포옹이 환자의 통증과 우울증을 완화하고 삶의 의지를 북돋워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안아주기 운동은 내가 자란 교회 공동체에서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된 것이다. 주일마다는 아니지만 수련회나 기도회 때마다 누군가 나를 안아 주었다. 주님이 나를 안아 주시듯 나도 누군가를 안아 주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낯선 이웃을 향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공동체 사람들을 안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작이었겠지만, 거기까지가 내 품의 한계였나 보다. 낯선 사람에게는 손 내미는 것조차 시도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매달 나는 숱한 사람들의 애환을 읽는다. 독자들이 보내 준 그 사연 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사는 모양은 달라도 이들 모두 누군가의 품이 그리웠던 게로구나.’ 누군가의 품에 온전히 안기고 싶은 것은 어쩌면 부족한 우리네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들, ‘사람’을 좀 더 따뜻하게 안아 주어야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