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오정현 목사
12월은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이나 모두 기뻐하며 들뜬 기분이 들게 된다. 바로 성탄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아기 예수는 춥고 초라한 말구유에서 외롭게 태어나셨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말이다.
그러나 어느새 성탄절은 교회가 세상의 상업화와 세속화에 그 자리를 내어 주고, 동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저명한 신학자 알렉 비들러는 성도의 이러한 이중적인 정체성을 “거룩한 세속성”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주님의 자녀가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선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점령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역할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나는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5:9라고 무책임하게 답한 가인의 말이 자주 떠오른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위로는 하나님, 옆으로는 교회 공동체 성도들과 친밀한 교제를 갖는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인들끼리 교제하고 위로하는 데 투자하지, 비기독교인과 대화하는 것을 꺼려한다는 점이다. ‘만일 지역사회의 교회가 다 없어진다면, 그 교회의 신자들 외에 교회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거린다. 교회는 약자와 상처 받은 자, 사회적 모순으로 아파하는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
영국의 지도자 윌리암 템플은 “세상 공동체는 회원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나 교회는 비회원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교회가 세상 밖의 사람들의 고통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부인 예수님을 우리에게 베푸셨다.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것을 나누고 베푸는 것은 당연하다.
베풂에는 기적의 요소가 있다. 우리가 하나를 베풀면 예수님은 거기에 열 배, 백 배의 기하급수적 은혜로 더하신다. 오병이어를 실천했던 한 소년의 베풂은 수천 명의 배고픔을 채워지게 했다. 아마 그 소년은 삶의 뼈대가 될 베풂의 기적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이 베풂의 기적을 오늘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약자를 돌보면서 경험해야 한다. 교회 밖 섬김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 나라 왕국을 하루 빨리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