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한정희 교수(홍익대 미술대학)
인쇄본의 성경이 나오기 전에 손으로 쓴 필사본 성경에는 그림이 많이 들어가 있었는데, 특히 삽화가 좋고 질이 높은 필사본이 <비엔나 창세기>이다. 14세기에는 베니스에 있었으나 1664년에 비엔나의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에 들어온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작품은 6세기경 비잔틴 시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의 사본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모두 192장이었으나 현재는 48장만 남아 있다. 모두 창세기의 내용인데, 창세기만으로 이렇게 많은 분량을 그린 것은 드문 일이다. 여기서는 그중에서 두 장면을 보고자 한다.
이 필사본은 모두 자주색의 양피지에 본문을 쓰고 그 아래에 삽화를 그렸다. 이 자주색 양피지는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이므로 왕실에 의한 주문 제작으로 보인다. 위쪽에는 창세기의 내용을 그리스어로 썼고, 아래쪽에는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 설명했다.
왼편의 것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배우자를 구해 주고자 자신의 늙은 하인 엘리에셀을 보내 리브가를 만나게 되는 장면이다. 그림에서 멀리 나홀의 성이 보이고, 왼쪽에 한 처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걸어오고 있다. 그 앞에는 샘의 여신이 개울가에 앉아 있고, 조금 지나 우물가에 그 처녀가 다시 등장한다.
곧 리브가는 하인과 낙타 10마리 모두에게 친절히 물을 주어 하인의 기도에 응답한다. 이 그림창 24:10~20은 고졸하고 간결하면서도 기품이 담겨 있다. 특히 낙타들이 오리처럼 목이 날렵하게 그려진 것이 특이하고 재미있다.
오른쪽의 그림은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장면이다. 그는 두 아내와 두 여종, 그리고 11명의 아들을 데리고 얍복 강으로 가고 있다. 다리가 있고 돌아가게 만든 것은 공간감을 부여하면서 많은 장면을 한곳에 그려 넣기 위한 방법이다. 일행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야곱은 밤에 천사와 만나 씨름을 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된다. 형 에서를 만나 화해하는 장면창 32:22~30까지 모두 이 한 그림에 담겨 있다.
자주색 종이에 파란색이 두드러져 산뜻한 색의 대비를 보이는데, 주인공이 여러 번 등장해 앞의 그림과 같이 고식古式의 전형을 따른다. 이 필사본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각 장면을 재치 있게 표현한 참신함이 가득 담겨 있다.
192장이나 되는 원래의 그림이 모두 남아 있었다면, 그야말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성경이었을 것이다. 후대의 세련된 성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소박한 감흥이 이 필사본에서 느껴지는 것은 순수한 신앙 자세와 하나님께로 향한 깨끗한 마음이 그림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편리함, 신속함, 달콤함을 찾던 현대인의 미각이 점차 유기농, 자연식 등 느림과 거침, 자연 그대로의 맛을 추구하게 되듯이, 위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기교와 꾸밈없는 순수한 신앙이 새삼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창조 질서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참 평안을 누리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