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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9월

로베르 캉팽의 메로데 제단화

과월호 보기 한정희 교수(홍익대 미술대학)

맨하탄 북쪽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클로이스터 분관에 소장된 메로데 제단화는 세 폭으로 이루어져 가운데는 수태고지, 왼쪽에는 이 그림을 주문한 부부의 초상화, 오른쪽에는 공방에서 작업에 열중하는 목수 요셉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그린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4은 플랑드르 지방 출신으로 북구 르네상스의 미술을 연 화가이다.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인 플랑드르에는 당시 모직공업과 국제무역으로 경제가 흥성했고, 따라서 부유한 시민계급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축적한 부를 통해 자신의 신앙심을 나타내고자 하여 제단화를 많이 주문했다. 플랑드르의 화가들은 인물과 자연을 사실적이고 현장감 있는 모습으로 성서의 중요한 주제들과 함께 세밀하게 표현했다. 또한 당시 새로 발명된 유화물감을 사용해 다양한 빛의 표현과 색을 구사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개인의 묵상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주문자는 가운데 패널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가문의 문장紋章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었던 상인 잉겔브레슈트 가문의 일원으로 보이며, 이들 부부는 왼쪽 패널에 묘사되어 있다. 제단화는 이렇게 주문자의 모습을 그려 넣을 수가 있기에 당시 널리 애용되었다.
중앙의 수태고지 장면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가 곧 성령으로 잉태할 것임을 알리고 있다. 그림에 표현된 상징을 살펴보면, 백합꽃과 벽 위에 걸려있는 주전자 모양의 세례반, 그 옆의 하얀 수건 등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신성함을 나타낸다.
왼쪽 위 둥근 창문에서는 마리아 쪽으로 빛이 비쳐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낸다. 또한 내려오는 작은 십자가 예수상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즉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심을 상징한다. 촛불은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하는데, 테이블 위의 촛불이 잠시 꺼져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신성에서 인격으로 변모함을 의미한다. 우아한 옷을 입고 앉아 성경을 읽는 마리아의 모습은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요셉의 모습과 대조된다.
수태고지 장면에서 잘 나타나지 않던 예수님의 아버지, 목수 요셉이 작업하는 모습이 오른쪽 패널에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요셉은 쥐틀을 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쥐로 상징되는 사탄의 권세를 무력화시키는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문 너머로 플랑드르 도시의 거리 풍경이 걸어 다니는 사람들과 함께 그려져 풍속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마리아의 수태고지는 이전에는 천사가 조용한 곳에 은밀하게 찾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성스러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평범한 집안을 배경으로 마리아는 방 안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일상의 모습으로, 수태고지를 알리는 가브리엘 천사는 다정한 친구와 대화하듯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오히려 열린 문 사이로 들여다보는 부부의 모습이 그들보다 더 엄숙하고 진지하게 보인다. 화가는 성스러움의 표현보다 인물 중심의 현실성 있는 묘사에 관심을 집중하는데, 이런 사실적 묘사 화법은 앞으로 전개될 미술의 큰 흐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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