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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2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과월호 보기 한정희 교수•홍익대 미술대학

기독교에서 순교의 역사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로마의 박해를 피해 어두운 지하에서 평생을 지낸 카타콤 이야기는 기독교 탄압에 대한 눈물겨운 투쟁의 간증이자 신앙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이다.
중세에서도 순교의 역사는 계속되었으며, 근세에 들어와서는 동아시아에서 순교가 많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심했으며, 에도 시대에는 한 해에 수만 명이 순교하는 참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도 기독교보다 먼저 들어온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전국적으로 신자들의 색출과 처형이 지속되었다.
순교에는 직접 처형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선교에 힘쓰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본에서의 순교가 전자에 해당하며,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가 병으로 사망한 루비 캔드릭은 후자에 해당한다.
루비 켄드릭(1883~1908년)은 텍사스 출신으로 캔자스 주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07년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그런데 개성에서 열심히 선교하던 중 그만 풍토병에 걸려 입국한 지 8개월 만에 25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녀는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이곳에서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그 후 그녀의 믿음의 고백대로 한국은 천만이 넘는 기독교인이 존재하고, 많은 선교사들을 세계로 보내는 나라가 되었다.
켄드릭은 텍사스 교회 동료들에게 “만일 내게 천 번의 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모든 것을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 편지를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들은 이들은 마음에 도전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수십 명이 선교의 꿈을 안고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왼쪽의 유재호의 사진은 양화진에 있는 켄드릭의 묘지석을 뒤에 있는 목련나무를 배경으로 찍은 것이다.  「Thousand」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작품은 고결한 켄드릭의 마음이 하늘에 닿는 것을 말해 주듯 꽃망울을 가득 안고 있는 목련나무가 후광과도 같이 켄드릭의 묘지석을 감싸고 있다.
작가는 그의 작품집에서 “복음의 빚진 것을 갚기 위해서, 또 빛을 나누기 위해 그녀가 우리에게로 왔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수많은 순교가 있었는데, 모모야마 시대에 가톨릭 선교사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서 1597년 나가사끼에서 26명이 한꺼번에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다. 일본에서 있었던 순교 장면을 자주 그리던 하세가와 로카(長谷川路可)가 이 모습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는데,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전통 일본의 에마끼 식으로 화면을 만들고 구름 사이로 처형이 이루어지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앞에는 조용히 기도하는 한 사람을 배치하였는데, 화면 가득 외로운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당시의 참상과 비극이 밝은 색조의 화면과 대비되어 마치 슬픔을 억누르듯 표현하고 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뿌린 순교의 씨앗은 헛되지 않았다. 그 씨앗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의 꽃들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우리도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길 기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을 하는 씨앗들이 더욱 많아지고 땅끝까지 퍼져서 어느 곳에서나 복음의 꽃이 피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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