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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6월

에스더를 왕후로 만든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2장)

과월호 보기 이문범 교수(사랑누리교회, 총신대학원 성지연구소)

역사 속 스파르타

주전 470년 페르시아(바사) 왕 다리오(다리우스)는 아테네 공격에 실패했다. 10년 후 그의 아들 아하수에로는 전열을 가다듬어, 그리스 북쪽에서부터 진격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1차로 테르모필레에서 길목을 막으려 했다. 그때 스파르타인 300명이 앞장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리스인은 끝까지 투쟁했고, 아하수에로는 결국 본국으로 돌아갔다. 1년 후 스파르타 군대는 플라타이아이에서 그리스 동맹군을 이끌며, 페르시아 군대와 맞섰다. 스파르타의 선전으로 그리스가 승리하면서, 최대 공로는 테르모필레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스파르타에 돌아갔다. 이후 아테네와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스파르타는 그리스 전체의 주도권을 잡기도 했다.


에스더를 세운 일등 공신

한편, 본국으로 돌아간 아하수에로는 어떻게 됐을까? 에스더 1장의 대연회는 주전 480년 원정에 앞서 열린 연회일 가능성이 크다. 이 연회에서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킨 왕은 에스더 2장에서 후회를 한다. 2장의 배경은 왕이 전쟁에 패하고 돌아온 직후였을 것이다. 

아하수에로는 주전 479년, 그의 즉위 7년에 에스더를 왕후로 맞는다. 이때는 남겨진 군대까지 모두 패했던 때다. 암담한 처지에 놓인 왕을 위로하고자 새로운 왕비를 찾던 중 에스더가 선발된 것이다. 즉, 에스더를 왕후로 세운 일등 공신은 스파르타였다.


스파르타 기상의 근원

스파르타 스타디움 앞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레오니다스의 동상이 있다. 그 아래 ‘모론 라베’라는 글이 있다. 테르모필레에 있는 동상과 비슷하다. 페르시아 왕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는 말을 했을 때 “와서 가져가라”, 즉 ‘네가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식의 조롱 섞인 말로 대답하며 항전했음을 말해 준다.

스타디움을 왼쪽으로 돌아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고대 헬라 시대의 아고라 흔적과 함께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교회 터를 볼 수 있다. 고지에 오르면 주전 6세기의 흔적과 함께 성벽, 승리라는 뜻을 가진 성 니케 바실리카, 아테네 구리 장인이 세운 신전 등도 보인다. 다른 헬라 문명에 비하면 초라한 유적이다.

다만 스파르타답게 원형 극장이 중앙에 남아 있어 군인의 위용을 키울 수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눈 쌓인 산맥으로 둘러싸인 원형 경기장에서 스파르타인이 자웅을 겨루며 전사로 키워졌음을 볼 수 있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

고대 스파르타인은 산맥을 넘어, 풍요롭던 메세니아 지역을 정복하고 그곳 사람들을 헤일로타이 계급으로 삼아 노예로 부렸다. 스파르타인은 자신의 힘을 믿고 80%가 넘는 헤일로타이를 가혹하게 다뤄, 결국 폭동이 일어났고 망하게 됐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하신 말씀대로 이뤄진 도시가 바로 스파르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