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이원석 작가(문화 연구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늘은 공부의 본질, 즉 공부의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 새롭게 살펴보려고 해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공부의 본질은 ‘사랑’이에요. 이는 공부의 조건이 믿음인 것과 연결돼요. 믿음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사랑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에요.
플라톤의 작품 《향연》에 따르면, 원래 인간은 네 개의 손발과 두 개의 얼굴이 있는 둥근 형태의 존재였다고 해요. 그런데 제우스가 이들의 방종을 막고자 반으로 갈라놓았죠. 그 후로 반으로 잘린 인간들은 자신에게서 분리된 나머지 반쪽을 갈망하게 된다고 해요. 물론 어디까지나 신화에 불과하지만 여기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나머지 반쪽을 찾아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곧 사랑이에요. 다시 말하면 분리돼 있던 상대와 연합하고자 하는 욕망이라 할 수 있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이를 채우고자 하는 게 사랑인 거죠. 마음이 가는 상대와 함께하고 싶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게 사랑이잖아요.
앎은 사랑이다
공부는 배움의 대상에 대한 사랑이에요. 영어나 수학 등 공부하는 대상에 마음을 주는 거지요.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공부는 배움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어요. 완전히 빠져들어 그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죠. 또한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배움 자체를 사랑하는 게 공부예요. 배움의 대상이 되는 지식을 사랑하기에 그것을 배우는 과정 또한 사랑하는 것이죠.
배움의 좋은 모델이 있어요. 바로 강봉수 박사라는 분이에요. 평생 법조인으로 사시다가 로펌을 은퇴한 후 육십 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꿈인 물리학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죠. 평생 법에 대해 공부하다가, 전혀 다른 물리학을 시작한 거예요. 하루 15시간씩, 7년 동안 공부에만 전념하셨어요. 유학 기간 동안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한국에 단 한 번도 들어오지 않으셨다고 하니 놀랍지 않나요? 물리학에 대한 사랑이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드러난 거예요. 이처럼 공부는 사랑이라는 말은, 알고자 하는 동력과 근원이 바로 사랑이라는 뜻이에요.
물론 지금 말하는 공부의 본질은 세상의 관점과는 달라요. 세상이 말하는 공부는, 열심히 배워서 돈과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게 목적이거든요. 지식이 도구에 불과한 거죠.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부란 지식을 사랑하는 거예요. 결코 도구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지식 자체를 좋아하고, 그 지식을 알아 가는 과정을 좋아하는 거에요. 그야말로 순수하게 배움의 기쁨을 동력으로 삼아 공부하는 거예요. 이런 공부의 결과는 당연히 친구들을 성장시키겠죠? 지식을 받아들이는 만큼 배우는 이가 경험하는 세상이 넓어지고, 배우는 이 또한 넓어질 테니까요.
진리에 대한 사랑
공부가 사랑이라고 한다면, 진리에 대한 공부는 더욱 그래야 할 거예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를 사랑해야지요. 기독교 철학자 아더 홈즈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고 말했어요. 이것은 우리가 배우는 대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라는 의미예요. 물리, 생물, 화학, 언어, 마음 등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거니까요. 그런 점에서 배움의 근거는 하나님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그 모든 진리 중의 진리는 바로 주님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진리세요. 그러니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 되신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하나가 돼야 해요. 구원의 진리 되신 분을 떠나서는 어디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까요.
1년 동안 나눴던 공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결국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기본 과정이었어요. 그리고 그 근본은 진리 되신 주님에 대한 사랑이고요. <큐틴> 친구들 모두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길 바라요. 그러려면 주님을 바로 알기 위해 공부해야 하겠죠? 주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공부를 하게 될 거예요.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 되길 소망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