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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십대의 감정에 그저 공감하다

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십대, 내 사랑 중딩 1호

“목사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새벽 1시에 믿을 수 없는 전화 한 통이 잠을 깨웠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아이의 절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았다. 전화를 끊고 30분 동안 침대 모서리에 앉아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병원에 가야 하나? 가서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하지?’ 그런데 아이가 울고 있는 장례식장에 갈 차가 없었다. 택시를 타고 갈 돈도 없었다. 아이의 슬픔에 내 가난이 더해져 마음이 참 괴로웠던 밤이었다. 결국 나는 다른 이의 차에 몸을 싣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아직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큰 슬픔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체구의 아이가 보였다.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아이를 위로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아이가 울 때, 옆에서 휴지를 건네주고, 지친 아이의 머리를 마음으로 쓰다듬었다. 그렇게 날이 밝았고 아이의 얼굴빛도 조금 밝아졌다. 나는 아이 곁에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아이는 나를 찾아와 웃으며 물었다. “목사님! 제사를 대신해서 하는 그게 뭐예요?” 추모예배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 아이는 내 사랑 중딩 1호가 됐다. 

  

공감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공감’(Empathy)이라는 단어는 1909년 미국의 심리학자 에드워드 티치너(Edward B. Tichener)가 도입한 말로, 감정이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어떤 심리학자는 공감을 타인의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로 보기도 했다. 정신분석학자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은 상대방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능력인 유연한 마음을 ‘응집력 있는 자기’(Cohesive)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한마음인 것 같은 연합의 상태와 나 혼자의 독립된 상태를 유연성 있게 즐기는 모습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에 있을 때 내 마음이 스스로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연합과 독립의 상태를 오가는 모습을 말한다. 

이 같은 유연성은 내가 다른 사람과 같아야 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내가 나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내 모습과 상관없이 내 편이 돼 주는 사람들과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면서 내 안의 자아를 만들어 간다. 그런데 이런 공감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공감하시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 11:14).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알고서도 이틀 후에야 나사로가 있는 마을로 출발하셨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아픔과 슬픔을 쏟아 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슬픔을 공유하셨고,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절망에 사로잡혔던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셨다.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죽음 가운데 흘리시는 눈물은 충격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인간의 아픔과 절망, 시련과 고난, 가난함과 억울함에 마음을 내주시고, 손을 잡아 주시며, 함께 울고 웃으시며 공감하신다.

십대는 차가운 현실 앞에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겪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공감이다. 어떤 것이 진정한 공감이고, 사랑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울다 지친 십대의 머리를 마음으로 쓰다듬어 주고 싶다.

억울해하는 아이 대신 화를 내고 싶고, 너무 아파 울지도 못하는 아이들 대신 울어 주고 싶다. 그저 곁에서 공감해 주고 싶다.


참고 자료: 《나도 나를 모르겠다》, 권수영 저, 레드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