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1. 진짜 무서운 이야기!
“폐가(廢家)와 흉가(凶家)의 차이를 아시나요?”
무더운 밤에 시작된 질문은 십대들의 등골을 오싹하기에 충분했는지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폐가는 주인이 없이 버려진 집입니다. 그리고 버려진 폐가에서 사람들이 흉한 일, 무서운 일들을 당하게 되면 그곳이 바로 흉가가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폐가입니까, 흉가입니까?”
한여름 밤 무서워서 시원한 이야기를 잔뜩 기대하고 듣던 십대들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이 샜는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성경은 분명 나에게 주인이 있다고 말씀한다. 나는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하지만 지금 내 모습은 어떠한가? 나는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주인을 잃어버린 폐가가 돼 버렸다. 또 악한 죄로 말미암아 아주 무서운 흉가가 돼 가고 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인 나의 삶에서 추악한 죄를 정확히 찾아낸다. 진정한 주인을 거부하고 죄로 말미암아 폐허가 돼 버린 흉가에 죄로 타락한 내가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십대들의 삶은 죄로 가득한 흉가인가? 아니면 말씀으로 가득한 거룩한 성전인가?
#2. 십대, Return!
‘회심’(回心)은 사전적 의미로, ‘마음을 돌이켜 먹음’, ‘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신앙에 눈을 뜸’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회심은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분리되고 의식적으로 빗나갔던 열등하고 불행했던 자아가 통합되고 올바르고 우월하고 행복한 존재로 변모해 가는 것이다.
이런 회심은 신학적으로 ‘회개’와 ‘회심’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 ‘회개’는 죄 고백, 용서 간구 등의 능동적 차원의 행동과 결단을 동반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회심’은 조금 다르다. 회심은 수동적인 차원이 강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신다. 그래서 신비하다.
심리학을 전공한 조직신학자 앤서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회심을 ‘거듭난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의식적인 행위’로 정의했다. 즉 회심은 죄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쪽으로 돌아서는 돌이킴(Return)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런 회심은 양면적 성격을 띤다.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회심시키셔야 하지만, 나 또한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야 한다.
십대인 나에게도 회심이 필요하다. 이제 그만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3. 회개, 위대한 결단!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9~20).
바울은 자신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죄로 인해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도망가지 않고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직면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의지적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바로 회개다. 회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베드로는 새벽을 알리는 닭이 울자 울었다. 왜 울었을까? 그는 자신의 죄가 떠올랐다.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너무나도 쉽게 예수님을 배신했다. 베드로는 흉가 같은 자신의 죄 앞에서 통곡했다.
십대들에게도 이런 회개가 필요하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나와 주님만이 아는 골방에서 무릎을 끓고 “예수님, 제가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회개하지 않아서 망하는 인생이 아니라 회개함으로 다시 살아나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결단, 곧 거룩한 결단이 필요하다.
십대들이여! 담대하게 거룩한 결단에 도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