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감정으로 말해요!”
어릴 적에는 엄마가 옆에만 있어도 든든했다. 엄마는 십대에게 천사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 엄마는 십대에게 낯선 모습을 보일 때가 간혹 있다.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닌데 불같이 화를 내는 엄마의 모습은 십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또 갑작스러운 엄마의 눈물은 십대를 꽤나 불안하게 한다.
십대에게 아빠는 거대한 나무 같았다. 하지만 언제인지 모르게 아빠의 등이 점점 작아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아빠의 회사에는 무슨 일이 있길래 우리 집의 영웅이던 아빠의 어깨를 자꾸 좁게 만드는 것일까?
십대가 자란 만큼 아빠, 엄마의 마음은 작아졌다. 자녀를 위해 낮아지고, 가족을 위해 많이 인내하며 여기까지 작아졌다. 그렇게 십대는 아빠, 엄마의 마음을 먹으며 자라 왔다. 그래서 지금 아빠, 엄마는 많이 지쳤다.
아빠, 엄마도 이해받고 격려받고 사랑받는 토닥거림이 필요하다.
‘나’와 ‘감정’ 구별하기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사람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의 이름을 가진 다섯 감정을 주제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인 ‘라일리’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 의인화된 감정들은 여러 가지 모험을 겪으면서 어려움을 극복한다. 주인공 라일리의 머릿속 감정들은 라일리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시사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렇기에 분노나 슬픔 등의 감정을 느낄 때 자신을 자책하거나 부끄럽게 여긴다. 또 기쁨과 같은 감정을 느낄 때는 그 감정에 몰입돼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것을 놓칠 때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이 나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부모님이 표현하는 감정도 부모님 자체가 아닌 것이다. 다만 그 감정과 자신을 구별하고, 감정 표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탈리아의 과학자 자코모 리졸라티는 타인의 행동을 보면 즉각적으로 활성화하는 뇌의 신경 세포를 발견하고 그 이름을 ‘거울 신경 세포’라고 명명했다. 이는 오늘날 ‘거울 신경 체계’로 불리는데,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공감’이란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누군가의 따뜻한 미소로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슬픔으로 인해 마음이 아픈 적이 있다. 이렇게 감정과 마음이 공유되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느끼고 공감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 연결되고 공감된 감정은 가정을 하나의 공동체로서, 더 따뜻하고 굳건하게 연결해 준다.
예수님께서도 우셨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예수님께서 나인성에서 한 여인을 마주치신다. 그녀의 마음은 고통스럽고 아프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다. 어미의 세상은 무너졌고, 마음은 죽게 됐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그 아픔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아픔을 아셨다.
마음의 찢김이 마음으로 연결돼 공감하셨고, 그녀에게 주님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님은 장례 행렬을 멈춰 세우고, 죽은 자의 관 위에 손을 대신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눅 7:14).
그렇게 공감하시고 마음을 내어 주시니 죽음이 멈췄다. 죽음이 멈추니 청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렇게 그는 다시 살아났다.
아빠의 마음은 슬프다. 영웅이었던 아빠는 힘을 잃어버렸다. 엄마의 마음은 어둡다. 감정에도 생기가 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빠와 엄마는 오랫동안 마음이 죽어 있다.
예수님께서도 우셨다. 가족처럼 사랑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나인성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셨다.
그리고 오늘 슬픔과 아픔, 외로움으로 힘들어하는 아빠, 엄마의 마음을 보며 예수님께서 우신다. 그래서 십대도 울고 싶다. 실컷 울고 나면 한결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공감이 필요한 아빠, 엄마를 한 번 꼭 안아 주면 부모님은 살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