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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8월

빈곤,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

과월호 보기 김대만 목사 (Youth&Community Ministry)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로 시작하는 각설이 타령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요즘엔 볼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5일장 같은 큰 장이 서는 날이면 어디선가 각설이패들이 나타나서 한바탕 흥겹게 노래를 하고 음식이나 돈을 받아 가곤 했어요.


빈곤한 사람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는 노랫말은 다시 찾아온 각설이가 귀찮다는 게 아니라 지난겨울에 얼어 죽지 않고 새봄에 또 보게 돼 반갑다는 의미예요. ‘각설이라도 살라’는 말에 담긴, 사람을 향한 우리 민족의 마음은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는 에스겔 선지자의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겔 16:6).
주변을 돌아보면, 행인들에게 돈을 구걸하거나 노숙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어요. 그러고 보면 빈곤한 사람들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었는데,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선택적이었던 것 같아요.
지난 2014년, 빈곤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집주인에게 월세와 공과금 70만 원을 남긴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을 기억할 거예요.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었죠. 이들의 죽음 앞에서 이 시대의 아픔과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요. 그 사건 이후로, 국회와 정부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대책들을 마련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죠.


아이러니한 세상
빈곤한 삶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을 때, 우연히 교회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이 있어요.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었던 장 지글러가 아들과 함께 나눈 대화를 담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예요. 책 표지에 실린 눈물을 흘리는 아프리카 아이의 사진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내용이 궁금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없이 부끄러웠어요.
기업의 회장이 최고급 가구들로 채워진 집에서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는 드라마 속 장면을 보다가, 드라마가 끝나는 동시에 이어지는 국제 구호 단체의 후원 요청 광고를 보는 일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일상이 돼 버렸으니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처럼 아이러니해요.
 
연대해야 가능한 일

이 책을 소개하는 경제학자 우석훈 교수님은 책에 나오는 칠레의 ‘아옌데의 비극’과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의 비극’을 언급해요. 소아과 의사인 아옌데는 칠레의 높은 유아 사망률과 어린이 영양실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약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칠레의 농장을 장악한 다국적 기업과 미국 정부의 반대로 결국 정권을 군인들에게 빼앗기게 돼요. 칠레의 어린이들은 다시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고요.
부르키나파소의 젊은 장교인 상카라는 전 국가적인 개혁을 시행해 무려 4년 만에 부르키나파소가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이끌었어요. 하지만 아프리카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프랑스 일부 세력들의 반대로 상카라는 살해당하고, 부르키나파소의 어린이들은 다시 극한의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게 되죠.
기아와 빈곤의 문제는 결코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예요. 구조적인 악의 문제가 해결돼야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세상을 살릴 수 있어요.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며 도전해 보면 좋겠어요.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곳에는 가난한 사람이 더 이상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