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2006년 10월

옥한흠 목사의 제자행전 ⑬ - “나의 소명은 국제 사회에 예수의 제자들을 배출하는 것”

전도행전 우은진 기자

미국 IMI 대표 주혜경 박사

 

· 약 력
일본 동경대 정치학박사
에너지 전략분석가
선교전략가
Kosta·에끌레시아 등의 강사
선교사 자녀를 위한 사역 펼침
IMI와 CIM대학 설립자·대표


이 세상의 지식이란 지식은 다 섭렵하려 했던 주혜경 박사. 그 이유는 예수의 제자들을 배출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먼저 세상을 이길 지식들을 구비하고 갖추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크리스천 리더들이 세상 가치관에 흡입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가치관에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모두 마스터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이런 소명을 불러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옥한흠 목사로부터 받은 제자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옥한흠 목사의 폐부를 찌르는 말씀과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으로서 소명을 다하라는 가르침은 그녀의 삶을 흔들었고, 지금까지 그녀의 인생에 화두가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인생의 고뇌를 안고 몸부림치다 성도교회로 인도
고뇌라는 고뇌는 모두 안고 몸부림을 쳤던 1975년. 주혜경 박사에게 스무 살 시절은 육체적으로는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고생했고, 정신적으로는 실존주의 철학과 무신론에 빠져 살던 시기였다. 아픈 몸 때문에 겨우 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다시 편입시험, 외무고시, 재입학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한계’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한계를 넘어선 ‘종교의 세계’에 흥미를 가진 것이다. 기독교가 배경인 집안을 떠올리며 기독교부터 연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난생 처음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 제목은 “신이여 당신이 존재한다면, 나에게 나타나 보시오”라는 다소 건방진 기도 제목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고향 오빠로 친하게 왕래하던 곽 씨 아저씨의 딸인 곽애림을 만났다. 그녀는 당시 성도교회 청년부의 부회장이었다. 그녀의 인도로 성도교회에 가면서 든 생각은 “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듯이, 기독교를 연구하려면 교회를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주일 대예배를 드린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고(故) 김성환 목사의 논리 정연한 설교가 바로 자신이 고민하던 종교와 철학을 비교 분석한 것이었다. 기쁨으로 온몸이 전율했다. 동기인 김성숙에게서 사영리를 전해 받고, 예수를 영접했다. 마음으로 영접했다기보다는 논리로 보아 영접해도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잘 짜인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훈련받다
그렇게 성도교회 대학부에 오게 된 그녀는 이미 틀이 잘 짜인 제자훈련 시스템에 놀랐다. 먼저 사영리를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소그룹으로 주제별 성경공부를 하고, 그 안에서 리더들을 선별해 토요일에 리더 훈련을 시켰던 것이다. 또 소그룹 성경공부가 끝나면, 옥한흠 목사의 간결하면서도 논리 정연한 그리고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설교가 있었다. 그녀는 생수와 같은 그 설교가 자신의 가슴에 퍼부어졌고, 그 설교를 듣는 것이 주일 대학부 예배의 하이라이트였다고 한다. 논리적 사고를 좋아했던 그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녀는 점점 교회 생활에 빠져들었다. 이런 말씀 공급과 함께 일대일 멘토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선후배 간에 말씀 중심의 교제가 이뤄졌고, 대학마다 다락방을 운영하여 공동체와 전도생활이 이뤄졌다. 한국 교회사의 한 편을 기록한 대학부로 인도받은 것이다.
이렇게 성경에 푹 빠질 무렵, 외무고시 공지가 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교회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려 할 즈음, 대천수련회가 열렸다. 대천수련회의 에베소서 강해는 그녀에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야 한다는 과제를 심각하게 던져줬다. 옥 목사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책이었던 『좌행참』을 설파했던 것이다. 예수 안에 앉고(座), 예수와 함께 동행(行)하여, 예수와 함께 대적(僭)하는 것이 성도의 삶임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했던 것이다. 그녀는 옥 목사의 강해 앞에서 고민하며 면담을 청했다. 처음으로 옥 목사와 가까이서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 자신의 질문과 답변을 듣던 옥 목사가 한 말은 “너는 시간이 좀 걸리겠다”라는 한마디였다.

 

죽음의 고비에서 주님을 만나다
계속 고민만 하던 그녀와 달리, 다른 청년들은 대천수련회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수련회 마지막 날 꽃게와 감자를 맘껏 먹고, 불을 피워 밤새도록 떠들면서 젊음의 열기로 충천했다. 반면, 그녀는 교실 끝 마룻바닥에서 자던 중 식중독 증세가 나타나며 온 몸에 반점이 빨갛게 퍼졌다. 간단한 조치를 하고 곧 서울로 올라왔지만, 두 달 남짓 되는 동안 이 식중독 증세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때 지푸라기를 잡는 기분으로 이모의 소개로 정수길 전도사를 만나 기도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녀는 75년 겨울 의사와 의학 세계의 논리를 넘어선,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인 회복을 체험했다. 그녀의 “신이여 당신이 존재한다면, 내게 나타나 보시오”란 첫 기도에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응답하셨던 것이다. 그녀는 은혜 가운데 살아나, 통곡의 회개를 하며 예수를 구주로 고백했다.
기적적인 일을 체험한 그녀는 그 시작이 대천수련회에서 날카로운 말씀의 검으로 자신의 영혼을 향해 던졌던 옥 목사의 말씀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대학부에 모이면, 말씀이 달고, 형제애가 너무 좋아 주말마다 교회에 모여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큰 기쁨이 됐다.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대학 캠퍼스의 일정한 장소에 가면, 그곳에는 늘 대학부 청년들이 모여 함께 먹고, 나누고, 성경공부도 하고, 학교 공부까지 함께 했다. 말씀을 연구하며 자신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인가 기도하고 고민도 했다. 또 이들은 ‘전도의 즐거움’을 아는 청년들이었다. 정말 초대 교회의 공동체가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형제애와 말씀 연구에 푹 빠지다
당시 그녀는 성도교회 대학부 중에서도 우애가 깊은 4기 출신인데, 1기, 2기, 3기에 비하면 그 수가 꽤 많았다. 서로 아끼고 격려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의 형제애에 푹 빠졌다. 친구로는 늘 푸근하게 품어 주던 김성숙과 언니 같은 곽애림이 가장 친했다. 지금 이집트에 가 있는 이혜영 선교사는 신앙의 동지였으며, 선우 란과 유정순은 격이 없이 친한 친구였다. 김재석과는 신앙 안에서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다. 지금도 4기들은 성도 4기 홈페이지를 만들어 서로 연락하고 있을 정도다. 그녀의 별명은 친구들 사이에서 ‘exciting’이었다. 죽음에서 살아난 그녀의 모습이 매일 ‘흥분의 나날’이었을 만큼 활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선배 중 박성남 선배는 특유의 유머로 좋은 선배의 역할을 해 주었고, 김광일 선배는 깊이 기억되는 선배라고 한다. 대학부에서 한국 교회 최초로 <Through the Bible> 교재, 곧 요즘 말로는 GBT 성경교재를 번역하기도 했다. 미국 장로회에서 발간한 <Through the Bible> 교재를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번역하기로 결정하고, 김광일 선배가 주축이 되어 그 일을 추진했다. 그녀도 그 일을 돕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다 번역해 성도교회 대학부가 판권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숙명여대 여성문제연구소 연구 조교로 일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여자들’을 연구하기도 했다. 주 안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씀 공부를 성도교회 내 ‘작은 자매 모임’을 만들어 ‘여자’라는 주제로 연구했던 것이다. 이는 제자훈련에서 파생된 열매들이었다. 

 

말씀과 영성의 균형을 이루다
인생의 극적인 사건을 통해 예수를 영접한 그녀는 성도교회, 예수전도단, 예수원을 통해 신앙훈련을 받으며 청년의 시대를 보냈다. 성도교회에서의 훈련은 그녀에게 ‘말씀의 인도’와 ‘성령의 인도’의 균형을 일깨워 줬고, 오늘의 그녀를 있게 한 중요한 훈련이 되었다. 그녀는 인생의 스승으로 옥한흠 목사, 대천덕 신부, 오대원 목사,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한 지도를 남긴 고 김성환 목사를 꼽았다. 이 스승들 가운데서 옥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과 연결하는 통찰력을 가르쳐 준 참 스승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대학부 시절, 예수전도단과 예수원을 자주 다녔던 터라, 옥 목사의 제자들 중에서 약간 독특한 편이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1990년대 어느 해 옥 목사가 그녀에게 “주 박사, 전 세계에 성령 운동을 하는 곳이 얼마나 되나?”라고 의미 깊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후에 안 일이지만 아마 그 당시 옥 목사가 그 주제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고 한다. 그녀는 말씀 중심의 제자훈련이 없는 성령운동은 위험하다는 스승의 가르침이 지금도 영성 기반에 중요한 기초가 됐다고 했다.
그녀는 옥 목사의 설교 중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다.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든 어느 곳에서나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씀이 큰 도전이 되었다며, 자신도 준비된 자가 되어 세계 곳곳에서 영향력 있는 이들을 배출하는 꿈을 이때부터 키웠다고 한다.

 

일본 유학, 공부를 통한 자비량 도구를 준비하다
그녀는 한 때 신학교를 갈까 하는 마음을 품기도 했지만, 긴 시간 기도하면서 하던 공부를 계속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하고 유학 준비를 했다. 그때는 이미 기도 중에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주님의 일꾼 세우기와 세계 선교의 비전”을 확실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는 말씀을 붙잡을 때, 그녀는 하나님께 “바울과 같이 자비량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헌신 하겠다”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1980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녀는 일본 동경대학 유학 시절에 일본인 교회만 고집하면서 다녔다. 일본 교회의 대학생들과 성경공부 그룹을 만들어 일본어로 말씀을 공부하면서 제자 삼는 일을 지속하기 위함이었다. 귀납적 성경공부의 경험이 없었던 일본 친구들이 흥미 있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타 문화권에서도 제자훈련이 가능함을 경험했다.
그리고 10년의 긴 시간이 지나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행정, 정치, 경제, 국제관계, 국제정치, 국제경제 등 대부분 사람들이 만든 사회와 구조, 권력을 연구하는 공부였다. 동경대학에서 국제 정치경제학전공으로 ‘다국적 기업의 정치 행태’라는 연구로 공부를 마치고, 1989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마음 중심에는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가졌던 비전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 즈음 주님이 주신 비전을 세울 길을 발견하고, 기쁨에 차서 모 기업의 중역의 직책을 맡아 귀국했다. 당시 그녀에게 공부는 바울이 사용했었던 천막을 깁는 자비량의 도구와 같은 것이었다.

 

무역회사의 시련 통과하고, IMI 학교 사역에 올인
1980년대에는 여자가 중역이 되는 일은 거의 없었던 시기였다. 그녀는 복음을 수출할 전진기지를 전 세계에 만들어  일꾼들을 그 곳에 보내고자 했다. 그리고 1990년 당시로는 생소하게 들렸던 컨설팅 회사와 무역회사를 직접 만들어 본격적으로 그 비전을 펼쳤다. 그리고 당시 중국의 경제 자유 특구에 무역사무소를 설립하고, 복음의 밀수꾼으로 파송할 한 선교사를 무역회사 직원으로 훈련시키는 일들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업자의 모함으로 시련을 겪었다. 동업자의 유혹과 강압을 뿌리치고 파산을 선택하자 동업자가 그녀를 쳤다. 30대 중반에 “돈과 명예와 권력”을 전부 가지고 승승장부 하던 그녀는 한꺼번에 시궁창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다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된 그녀는 자신을 부르신 목적이 ‘학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곧 신학교와 선교 단체의 훈련 프로그램과 교과 과정을 분석했다. 1992년 연구를 통하여 그 당시 한국 선교단체나 신학교에서 부족했던 언어 훈련, 타문화 적응 훈련, 열정을 지식으로 채우는 훈련 등을 뼈대로 IMI의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는 비행기 안에서 학교 설립을 위한 1,000번 기도에 들어갔다. 기도 중에 인도를 받으며 93년 하버드 대학의 교수이자 그녀의 논문 지도교수와 다시 연결되었다. 그 후 그녀는 글로벌 그룹의 두뇌 집단의 전문가로 에너지 전략 분석가이자 극동 지역을 담당한 대표가 되어 컨설팅으로 자비량하며 학교를 설립했다.

 

평생의 비전, 차세대 크리스천 리더 양성
그리고 1995년 가을에 학교가 시작되는 또 한 번의 기적을 체험했다. 지금까지 201명의 훈련생들이 머리, 가슴, 손·발이 예수님의 제자로 준비되는 훈련을 받고 있다. 그녀는 한때 선교사 자녀들을 교육하는 커리큘럼을 만들어 대학의 제자들 중에서 교사를 뽑아 훈련시켜 오지 선교사 가정으로 보내는 사역을 만들기도 했다.
그녀는 학교 사역을 하면서 1996년 제프리 브롬이란 선교사와 만나 결혼해, 46세에 첫 딸 아이를 품에 안았다. 함께 IMI 사역을 하면서 제자들을 길러내는 데 몰입하던 중, 2001년 남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아픔은 지금도 그녀를 힘들게 하지만, 주님이 부르신 “예수의 제자 삼는 IMI 학교 사역”은 그가 간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녀는 제자의 삶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영적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삶이라며,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다시 내려놓고 예수의 제자들을 키워내는 이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점검받는 시간을 갖고 있다.

<우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