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2006년 11월

옥한흠 목사의 제자행전 ⑭ | “제자훈련은 내 삶의 전부이며, 오늘을 사는 의미이다”

전도행전 우은진 기자

다운교회 이경준 목사

 

* 약 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원 수료
개혁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
現 풀러신학교 선교목회학 박사 과정 중
    다운교회 담임목사
    이랜드 사목
    이랜드 재단 및 사회복지재단 이사장
    아시안미션 이사장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가장 큰 감동과 영향을 미친 대상이 하나둘쯤은 있기 마련이다. 책, 사진, 사람, 영화, 건축물, 자연 등. 다운교회 이경준 목사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가장 큰 영향을 준다고 믿고 있다. 함께 어울리고, 음식을 나눠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살을 부비며 자신의 존재 의미와 행복감을 느낄 때 말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30년 전 만난 스승 옥한흠 목사와 친구들 때문이다. 그저 내성적이고 책임감 강했던 학생이었던 그에게 성도교회 대학부는 평생을 살아가는 데 소중한 가치관을 가르쳐 줬고, 평생지기들을 만나게 해준 공동체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가 자신의 삶의 전부이자, 이것을 안 하면 못 산다고 고백하게끔 만든 ‘제자훈련’을 만나게 해줬다. 성도교회 대학부 1기 출신으로, 조금은 뒤늦게 ‘옥한흠 목사의 제자행전’에 합류한 다운교회 이경준 목사를 만나보자.

 

 

 

친구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기독교로 전환
어릴 적부터 할머니의 열성적인 불심과 미신이 혼합된 종교 문화 속에서 자란 그는 열심히 절에도 다니고, 대청마루 한편에 둔 돌아가신 할아버지 사진에 하루 6번씩 2년 동안 절을 할 정도로 기독교와는 정반대 생활을 해왔었다. 그런 그가 성도교회 대학부에 오게 된 계기는 그의 투철한 책임감과 빚지고는 못 사는 성품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인생이 방향을 튼 것은 한참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던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집안이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방학 때면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과외수업을 몇 개 지도해야 했다.
그때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던 방선기 목사가 성도교회 김희보 목사의 셋째 딸과 친구 세 명을 과외 지도하라고 소개시켜 줬다. 빚지고는 못 살던 그는 신세를 지면 갚아야 한다는 보답 차원에서 방선기 목사의 권유도 있고 해서 성도교회 대학부에 나갔던 것이다.
사실 그는 기독교에 반감이 강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돈을 떼먹었던 이가 바로 교회 집사였고, 미신적인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그러나 지성인이라면, 기독교에 대해 알고 반박하자라고 일단 마음먹자, 친구의 빚도 갚을 겸 성도교회에 1970년 12월 13일에 발을 디뎠다. 그 당시 성도교회 대학부는 제자훈련 1기생으로 방선기 목사, 김병재 변호사, 2기로 박성수 회장, 박성남 전도사, 한정국 선교사 등 쟁쟁한 멤버들이 주름잡던 시기이다.
교회에 오자마자 당시 성탄절 장식이 한창 준비 중이었다. 평소 남다른 솜씨가 있던 그는 영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심히 성탄장식에 열중했다. 교회 입구 아치에 커다란 종을 달고 멋지게 꾸며 당시 친구들로부터 호평도 받았고, 나중에는 교회 근처 군부대가 그 종을 떼어다가 자기네 부대에 걸어놓기도 했다.
당시 1, 2기생들은 며칠 밤을 새면서 같이 놀며 교제를 나눴었다. 집에서는 ‘복덕방 영감’, 밖에서는 말을 잘 안 하는 ‘샌님’ 이었던 그에게 동년배 친구들과의 어울림은 불공드리러 오는 중년 아줌마들과 절에서 식사를 같이 하는 것보다 훨씬 즐거웠다. 이런 친구들과의 교제가 기독교로 전환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복음을 영접하고, 대학부와 삶을 함께 하다  
기독교로 종교를 바꾸려고 작정하던 참에 그는 옥한흠 목사가 전한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에 부딪히게 됐다. 기독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 내가 택함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종교라는 것이 말씀의 요지였다. 그는 갑자기 기독교가 독선적이고 배타적으로 느껴져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계기가 되어 복음을 분명히 하고, 2개월 후 1971년 2월말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을 앞에 두고 주님을 영접했다.
성도교회에 온 이후부터 그는 대예배를 드리고 대학부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대학부에서는 ‘일일 성경’이란 제목의 책으로 성경공부를 했었는데, 3년 동안 성경을 전체적으로 공부하게 만든 교재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한번은 옥 목사가 연말을 기해 ‘71년도를 위한 나의 다짐’과 ‘기도제목’을 쓰라고 했는데, 그가 쓴 다짐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겠습니다”였다. 또 기도제목은 ‘위의 사항이 이뤄지도록 도와주십시오’였다. 그는 “옥한흠 목사님께서 당시 저에게 귀한 훈련의 기회를 만들어 주셨고, 하나님께서는 그해 기도제목에 넘치도록 응답해 주셨다”고 고백했다.   
성도교회 대학부에 있어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남산으로 가는 길에 있던 시민아파트에 살았던 옥 목사의 사택을 방문했던 기억이다. 그때 동기들과 함께 사모로부터 대접받았던 라면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또 옥 목사와 대학부 학생들과 함께 백운대를 갔던 기억도 잊지 못할 추억이며, 교회 내 비어 있던 김희보 목사의 사택에서 방선기, 박성수, 박성남 등 4인방과 토요일 밤을 새며 이야기하고 새벽예배를 드리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새롭다.
그는 “옥 목사님은 우리들과 삶을 함께 나누셨으며, 그때의 경험은 제가 지금 목회사역을 하는데도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고 말한다. 목회자의 집을 오픈하여 형제자매들이 드나들도록 하는 것, 정기적으로 사람들을 만나 상담해 주는 것,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 주는 것, 그 안에 예수님의 제자훈련이 모두 스며들어 있었는데, 스승의 그런 모습을 자신도 자연스럽게 본받게 됐다는 것이다.

 

네비게이토 선교회·출판사역에 투신하다
대학교 2학년 때 복음을 처음 접하고,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을 스승을 통해 배운 그는 대학부에서 옥 목사의 가르침과 제자훈련, 선후배간의 끈끈한 형제애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런 그가 3학년이 되자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캠퍼스 내 네비게이토 선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옥 목사님께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교회생활과 비슷한 시기에 캠퍼스 선교회 활동을 했었는데, 팀에서 ‘전적으로 헌신하라’는 말과 함께 ‘교회를 옮겨서 한 교회로 다니자’”라는 제안에 성도교회를 떠나게 됐다고 한다. 그때 많은 갈등을 했었다는 그는 옥 목사를 볼 때마다 그때의 일이 떠올라 마음 한 구석이 늘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현재 목회를 하고 있는 그는 “가끔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있을 때마다 당시 옥 목사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고 한다. 지금 목회를 하며 갖게 된 생각은 한국 선교단체들이 주일에는 각자가 속한 지역 교회에서 잘 섬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자신처럼 갓 예수를 믿고 구원을 즐거워하며 성도 간의 교제에 행복해할 시기에 지역 교회와 선교단체 사이에 갈등을 하게 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주중에는 각자가 처한 곳에서 열심히 전도하고 훈련받고, 주말에는 지역 교회에서 잘 섬기도록 도와주면서 지역 교회는 선교단체를 적극 후원하는 일에 힘쓴다면, 현재 한국 교회과 선교단체 간의 갈등도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조언했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 5년 가까이 학부와 대학원, 군 제대까지 마치고 선교회에 몸담으면서 공동체 생활과 제자훈련을 한 후, 그는 앞으로의 진로를 두고 고민했다. 그래서 79년 3월 네비게이토 출판사에 들어가 11년 동안 일했다. 사람을 제자훈련 하는 것은 솔직히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출판사역은 한 번의 책 출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보람을 안겨 줬다. 『그리스도인의 확신, 생활지침』, 『그리스도인의 생활연구』, 『제자 삼는 사역의 기술』 등은 그의 손을 거쳐 발행된 한국 교회에 영향을 미친 주옥같은 책들이다.

 

교회를 개척하고, 미션회사의 꿈을 키우다
1990년 출판사를 사직한 그는 잠시 방선기 목사와 함께 두란노 서원부장과 출판부장을 각각 맡기도 했다. 그리고 91년 3월 이후 이랜드 사목, 아시안미션 총무, 대표를 거쳐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다. 94년 개혁신학원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 해 9월 당산동에 43세의 나이로 교회를 개척했다. 처음에는 그동안 제자훈련을 했던 청년들과 제자훈련을 하며 시작했다.
교회를 개척했지만, 큰 투자도 없었고, 오로지 ‘하나님, 말씀, 사람’ 세 가지만 붙들었다. 그는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묻자, 자신이 목회자로 부르심 받았다기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사명에 부르심 받았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주일 하루 동안 하는 교회 일보다는 평일 날 하나님 왕국의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이 복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아담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다운교회를 개척한 그는 심방이나 행정업무보다 각 개인에 맞는 커리큘럼을 만들어 1주일에 여섯 팀을 인도하는 제자훈련 목회에 사역의 모든 기쁨을 걸고 있다. 그는 “제자훈련을 21살 때부터 해왔기에 이제는 제자훈련을 안 하면 큰일 난다”며 “제자훈련은 내 삶의 전부”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제자반도 각 그룹별로 2명에서 8명까지 다양하다. 특히 이 교회에는 어린이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고, 기러기아빠 등 가정문제가 심각해지자 아예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가르치는 어학원도 운영 중이다. 
이랜드 계열회사인 아시안미션 이사장으로 있는 그는 앞으로 ‘미션회사’를 만드는 게 꿈 중 하나다. 이랜드는 재단을 여러 개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을 후원하기 위해서다. 이랜드는 크리스천회사이지만, 미션회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크리스천회사도 이익을 내는 게 목적이기에 일 잘하는 일꾼이 우대받는다. 그러나 미션회사는 일도 일이지만, 선교할 수 있는 일꾼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한 직원은 일부러 훈련을 거친 후 동남아시아 봉제회사에 봉제공으로 입사하여 51명의 현지인이 주님을 영접하도록 도운 일도 있었다.

 

스승과 친구 4인방, 세 가지 비전이 같다
30여 년 전 성도교회 대학부는 그에게 세 가지 큰 축복을 주었다. 하나는 복음을 통해 제자훈련을 만난 것이다. 두 번째는 평생의 스승 옥한흠 목사를 만난 것이다. 세 번째는 대학부 때부터 4인방이었던 방선기, 박성수, 박성남 등을 지금까지 만나오며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일 년에 두 번 4인방 친구들과 스승의 날과 생신날, 옥 목사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큰 축복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때 교회를 떠나 선교회로 발길을 돌렸던 자신이 다시 선교회를 떠나 스승을 찾았을 때, 옥 목사가 한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단다. “너 이제 사람 되었구나” 하시며 기쁘게 반겨 주셨던 것이다.
또 4인방 중 한 명인 방선기 목사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이니 42년간을 교제해 오고 있고, 박성수 회장, 박성남 전도사와는 성도교회 대학부부터 35년 가까이 만나오고 있다. 그래서 이랜드 직원들은 이 네 사람을 4인방이라 부르며, 어떻게 그렇게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첫째, 비전이 같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스승인 옥한흠 목사로부터 캠퍼스 미션, 비즈니스 미션, 월드 미션 등 3M 비전을 배우고, 그 비전을 지금까지 각자의 삶의 터에서 실천해 오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4명 다 ‘검소한 삶’이라는 라이프스타일이 비슷하다.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수준보다 조금만 낮추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지금도 만나면 식사로 짬뽕이나 자장면이면 충분하고, 가끔 돌솥비빔밥으로 격을 높일 때도 있다고 웃음 짓는다.
셋째는 부인들의 스타일이 비슷하다. 네 명의 아내들이 서로 잘 어울리고, 본인들의 생일은 물론, 남편들의 생일을 빙자하여 서로 잘 모인다. 남자들이 아무리 친해도 업무상 모이는 일을 제외하면,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아내들이 서로 마음이 잘 맞으니 남자들의 우정도 더욱 돈독해졌다는 것이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는 성도교회를 통해 믿음 생활을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로 자신을 인도하셨다고 감사해 했다. 성도교회를 잠시 떠났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선으로 바꾸셔서 자신을 다듬으시고, 지금의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다운교회를 시작한 지 벌써 11년이 되었다고 회고하며, 교회를 시작할 때 가장 큰 은혜는 ‘목회철학’을 주신 점이라고 강조했다. 즉, 창세기 1장 27, 2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원래 모습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도록 교회의 목적을 삼으셨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스승인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이 ‘한국형 제자훈련’으로서 한국 교회 안에 잘 정착된 점을 스승의 업적으로 꼽았다. 제자훈련을 교회와 잘 접목시킨 점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옥 목사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친구들과 옆에서 잘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끔 전도할 때도 ‘이 사람이 제자훈련 대상인가’ 스스로 평가하며 전도하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놀랄 때가 있다고 한다. 그는 사람이 목적이 되는 교회를 이끌어가면서,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제자훈련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리고 그 사명을 스물 한 살 청년에게 일깨워 준 스승에게 목회를 하면 할수록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제자훈련을 인도할 한 영혼 한 영혼을 생각하며 기쁨에 젖는다. 그들이 예수의 제자로 서서 하나님의 왕국을 만들어 갈 모습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우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