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이의용 소장_ 교회문화연구소
내가 청소년이었던 1960년대는 활자를 조합해 신문을 찍어내는 ‘활판 인쇄’ 시대였다. 당시 인쇄소에는 도장처럼 새겨진 납 글자들이 가득했다. 세상의 모든 글자를 납 글자로 여러 벌 만들어 분류해 놓고, 기자가 써낸 원고를 보면서 전문가가 핀셋 같은 걸로 한 글자씩 찾아내 조합해서 찍어내는 방식이었다. 한글도 그 종류가 많지만, 한자까지 사용하던 시절이니 정말 원시적이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그래서 어느 신문에서는 ‘대통령(大統領)’을 ‘견통령(犬統領)’으로 잘못 조판해 정간을 당한 적도 있었다.
당시 활판 인쇄는 비용이 상당히 비싼 고급 인쇄방식이었다. 그래서 등사(謄寫)방식을 많이 이용했다. 초를 입힌 종이를 ‘가리방’(철판) 위에 놓고 철펜으로 구멍을 낸 다음, 석유를 섞은 잉크를 롤러로 밀면 종이 사이로 잉크가 번져 나와 글씨가 박히는 복사 방식이었다. 학교의 시험지나 관공서의 문서도 이걸로 인쇄했다.
등사기로 주보를 찍어 소통의 도구로 사용
당시 교회는 과학문명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었다. 교회는 등사기로 주보를 찍어내 교회 공동체의 소통 도구로 유용하게 활용했다. 나아가 교회 회보도 발간했다. 학생회나 청년회가 회원들의 글을 모아 만들어낸 두툼한 책은 당시로써는 훌륭한 문학지였다. 가을 저녁에 동네 학생들이나 청년들이 모여 거기에 실린 글들을 낭독도 하고 노래도 부르는 ‘문학의 밤’ 행사를 열곤 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나도 철필로 원지를 긁어 주보나 악보를 수없이 만들어 봤다. 원지에 철필로 글을 쓰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무엇보다 수정이 쉽지 않았다. 중간에 잘못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등사기에 원지를 붙이고 롤러로 잉크를 고르게 밀어 인쇄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작업을 하고 나면 손과 얼굴에 까만 잉크가 여기저기 묻어 있기 일쑤였다.
아무도 없는 토요일 밤, 추운 예배당 구석에서 주일에 쓸 주보를 인쇄하다 보면 아침이 되곤 했다. 그걸로 두툼한 회보를 만들려면 방학 내내 작업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고생 끝에 나온 한 장의 주보나 악보를 볼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등사기로 인쇄한 주보는 촌스러웠지만, 당시 신앙만큼은 첨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프셋 인쇄방식, 목회와 선교에 효과적 수단
그 후 오프셋 인쇄방식이 도입되면서 인쇄방식은 간편해졌고 지면도 정밀해졌다. 사진도 선명해졌다. 이때 ‘신도리코’로 대표되는 복사기가 출연하면서, 등사기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컬러 오프셋 인쇄기, 컬러 복사기도 등장했다.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인쇄술은 오늘처럼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기술로 첨단화됐다.
당시 교회는 인쇄 기술을 목회와 선교에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인쇄물을 이용해 수십 명, 수백 명이 소통할 수 있었다.
초창기 주보는 A4 용지를 한번 접은 규격이었다. 첫 면은 교회 이름과 예배당 그림, 목회자와 장로, 지휘자와 반주자 이름이 장식했다. 둘째 장에는 주일 아침예배 순서, 셋째 장에는 저녁예배와 수요예배 순서, 그리고 뒷장에는 광고와 헌금, 출석 성도수의 통계가 자리를 잡는 게 보통이었다. 오늘날까지도 한국교회 대부분의 주보는 이 틀을 유지하는 교회가 적지 않다. 소망교회 주보가 좋은 예다.
주보는 교회의 역사와 문화다
한 가지 되돌아보게 되는 건 주보 첫 면의 예배당 그림이다. 무심코 시작했던 예배당 그림은 교회가 건물이라는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그래서 어느 교회는 교인들의 얼굴 사진으로 첫 면을 장식하고 있다. 요즘 주보들은 지면도 늘어나고 내용도 다양해졌다. 새 가족 소개, 성경공부 교재, 구역이나 소그룹 활동 자료 등을 담아 수십 페이지나 되는 주보도 나오고 있다.
한국 교회 안에서 한 해 동안 소비되는 주보의 양도 엄청날 것이다. 그래서 서울 응암교회는 예배 후 주보를 놓고 나가도록 해 재활용을 하고 있다. 앞으로는 홈페이지가 주보의 기능을 어느 정도 나눠서 담당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주보는 교회 역사, 교회 문화의 기초가 된다. 그래서 더 정확하고 품위 있게 편집돼야 한다. 주보는 또 구성원들 간의 소통 창구라 할 수 있다. 화려한 주보와 회보, 신문들이 교회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작 구성원 간에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교회가 신음하고 있으니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 초기 한국 교회 주보들은 대부분 교회 건물을 주보 1면에 게재했다.
◀ 한국 교회 주보는 점차 교회 건물에서 교회 예배 광경을 1면에 넣고 주보의 사이즈도 세로에서 가로 사이즈로 다양화됐다.
◀ 최근 한국 교회 주보는 교회 건물이나 예배 광경을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풍경이나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심볼, 또는 교인들의 얼굴을 넣어 디자인 되기도 하는 등 1면이 바뀌고 있다.
◀사랑의교회 주보는 한국 교회에 한 틀을 유행시켰다. A5 사이즈의 3단 접기방식은 물론 1면에 주일예배 순서와 공동체 고백이 나온 점이 특징이다(맨 앞에서 부터 1995년, 1997년, 2000년도 사랑의교회 주보).
▲ 한국 교회 주보는 예배 안내와 교회 행사, 교회 표어, 교회 구성원 소개 등 개 교회 교인들의 신앙 생활의 안내지 역할을 해왔다. 더불어 디자인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 교회 주보는 교회 안밖의 진정한 소통의 도구로서 과제를 안고 있다.
▲ 성터교회 주보는 영어한마디와 책소개 등 다양한 콘텐츠로 짜여져 있다(위쪽). 신양교회 주보는 마치 매거진을 보듯 알찬 내용들로 가득하다(아래쪽).
▼ 주보는 작게는 교회 안의 소통의 도구이며, 크게는 한국 교회 역사와 문화를 나타낸다.
이의용 장로는 문학박사로 교회문화연구소장, 대전대와 중앙대 겸임교수, CBS 크리스천매거진 MC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