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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행복 지수는 내 얼굴에서 산출된다. 그리고 가정의 행복 지수는 배우자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연애하는 사람의 얼굴이 예뻐 보이는 이유는 그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소원은 그 짝사랑의 상대가 나를 알고 사랑하게 되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일까?
호세아서를 보면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에 대한 경고와 심판에 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간음한 여인처럼 사랑을 훼손시킨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고결하고 아름답게 빛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 멸망당하게 된 것을 깨달은 ‘남은 자’들은 이제 여호와를 알자고 외친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3절)라는 것은 ‘여호와를 알도록 최대의 정성과 힘을 다 기울여 노력하자’라는 것이다. 여호와를 알아 감으로써 우리에게 생기는 영적 유익들이 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절실한 사랑을 알게 되고(요 3:16), 그리스도를 닮아 장성하게 되며(엡 4:13), 풍성한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고(3절),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뚜렷해진다(빌 3:12).
당시 이스라엘의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불의의 원인은 이웃에 대한 인애의 결핍과 제사장들의 패역함(8~11절)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신 6:5), 이웃을 사랑해야만 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헌신과 사랑으로 입증되기 때문이다(요일 4:20). 그러나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이웃을 사랑하지도 못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진 제사로는 탐욕과 행악에 물든 제사장들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영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그분은 사랑 없는 형식적인 제사와 번제를 원하지 않으셨다.
남자들이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예배 형식만 잘 갖춰서 드릴 뿐, 정작 인애를 베풀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관심 없지 않은가? 남자들은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보여 주기 위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임을 결코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