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CK
과월호 보기
어릴 적, 아들이 거짓말을 했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거짓말을 했다. 아들의 반성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엄마, 제가 하나님과 엄마, 아빠에게 크나큰 죄를 저질렀어요. 저는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 수 있으니 용서해 주세요. 사실은 제가 이번 주 지난 주 교회를 못 갔어요. 죄책감이 너무 들어 혼자 울면서 예수님께 기도했어요. 이러다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고요. 더 이상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도 말하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어요. 용서해 주세요”.
아들은 오랜 시간 홀로 고민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거짓말을 감추느라, 감춘 거짓말이 들통 날까 봐. 혼날까 봐, 계속 거짓말을 하는 아이가 될까 봐, 엄마아빠가 실망할까 봐. 하나님을 속인 죄로 벌 받을까 봐. 죄책감에 시달렸다. 실망감에 스스로를 못난 인간 취급했다. 그리고 불안해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다 했지만, 그 아이는 이미 충분히 벌을 받았다.
아이의 마음을 알고 보니 불쌍했다. 양심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감추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조그만 일이라도 의논하지 그랬어?” 그러고는 기도해 주며 하나님의 용서를 선물했다. 펑펑 울었다. 아들과 나는 은혜로 하나가 되었다. 아들은 이후 두 번 다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 한 형제들을 이미 용서해 주었다. 그럼에도 아버지 야곱이 죽자, 다시 용서를 간청하는 형제들을 보며 운다(창 50:17). 가해자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두려움, 불안, 걱정, 염려, 죄책감 등. 그것은 가해자의 잔혹성이 아니라 연약성이요, 미성숙이었다. 가해자의 뒤안길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 비로소 용서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걱정하면서 용서를 위로로 승화시킨 부모가 있어서 우리네 자녀들은 오늘도 자라간다.
“공사 중! 어머니,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내 아들의 이마에 새겨진 글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