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2013년 12월

지혜와 지식

과월호 보기


해마다 명절이면 식구들이 모두 모인다. 대식구의 맏며느리인 나는 일주일 전부터 계획해서 시장도 보고 김치도 담근다. 식구들이 모이기로 한 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본격적인 요리에 들어간다. 전도 지지고, 나물도 볶고, 생선도 찌고, 고기도 재야 한다. 저걸 언제 다하나 싶어 한숨을 쉬고 있는데, 일찍 도착한 동서가 다가와 주저하며 말한다.
“저… 형님, 어떡해요? 교수님들 찾아뵙고 인사하러 가야 한다는데… 잠깐 다녀오면 안 될까요?”
순간 화가 확 치민다. ‘막내는 허리 수술해서 못 오고, 어머님은 몸이 불편하셔서 꼼짝 못하시고 나밖에 없는데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한마디 하고 싶은데 미안해하는 동서 얼굴을 보니 차마 뱉을 수가 없다. 대신 어머님 얼굴을 쳐다본다. 눈이 딱 마주쳤는데 어머님은 시선을 돌려 먼 산만 바라보신다. 어른이 가만 계시는데, 아무리 손위라 해도 뭐라 할 수는 없다. 얼른 마음을 다잡고 말한다.
“그래, 동서, 잠깐 다녀와. 오죽 급하면 그러겠니?”
잠깐 다녀오겠다던 동서는 저녁 밥상 차려서 수저를 들려는데 들어왔다. 또 화가 난다. 어머님 얼굴을 쳐다본다. 역시 아무 말씀 안 하신다. 내심 서운하다. 다들 돌아간 뒤에 피곤이 몰려온다. 소파에 누워 한숨을 푹 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어머님이다. “아가~.” 나지막하고 부드럽게 부르시는데 일순간 마음이 녹아내렸다.
“서운했지? 왜 내 편 안 들어 주냐 싶어서. 아랫것들이 뭘 안다냐? 내가 네 마음 잘 안다. 고생했다. 어서 푹 쉬거라. 애비한테 맛있는 것 사 달라 하고.”
마음 알아주는 한 사람이 있다. 쌓여 있던 피곤함, 서운함, 짜증, 원망이 눈 녹듯 사라졌다. 어머님은 나중에 그때의 심정을 말씀하셨다. 맏며느리 마음 읽자니 둘째 며느리 마음 상하겠고, 둘째 며느리 마음 읽어 주자니 맏며느리 마음 상할 것 같으니 아예 입을 다무셨노라고. 어설픈 개입보다 확실한 침묵을 택하셨노라고.
이를 일러 지혜라 한다. 지식과는 다르다. 지식을 운용하는 것이 지혜다. 어머님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하셨지만 지혜로는 박사급이다. 어머님의 지혜는 세월이 흐를수록 빛을 발한다. 동서간, 고부간, 조손간 관계에 생명의 꽃이 피어오른다. 진정 복된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