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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7월

내가 누구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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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신병원에서 3년을 치료사로 일했다. 입원 환자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감각이 죽어 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거절을 못한다. 한마디로 말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존재감이 없다. 걸음걸이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들은 발을 질질 끌면서 유령처럼 걷는다. 언제 들어와 있는지 모르게 들어와 있다.
치료의 시작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소리를 내고 발을 구르게 한다. 사실 이건 가르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 모두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낼 줄 안다.
아기가 세 살이 되면 심리적 분리를 시도한다.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싫어, 내가 할 거야. 내 거야”다. 엄마와 나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부모들은 ‘미운 세 살’이라며 타박한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라고 소리치면 아이 목소리가 쏙 들어간다. 엄마와 다른 소리를 내면 혼난다는 사실을 학습한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온다. 사춘기다.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는 호르몬의 힘을 빌려 강력한 소리를 낸다. “내 인생은 내 거예요. 제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마세요.” 엄마들은 더 크게 소리친다. “시끄러! 기껏 키워놨더니 한다는 소리 하고는. 네 인생이 어째서 네 거냐? 내 거지.” 완벽하게 짜놓은 스케줄 표를 내민다. 이대로만 살면 성공이 보장된다는 듯이 말이다. 아이는 또 배운다. 소리 내지 않는 법을.
중년기는 마지막 기회다. 호르몬의 대 반란이다. 여성호르몬이 자취를 감추면서 남성호르몬이 얼굴을 들이민다. 질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엄마로서, 아내로서가 아니라 내 이름 석 자로 살고 싶다는 절규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아버지로, 남편으로 희생하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나라는 존재로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모세도 묻는다, 내가 누군데 나에게 이런 미션을 맡기시냐고. 하나님은 동문서답 같은 답을 하신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누구인지보다 누가 나와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존재를 확인하려는 소리와 아우성은 한평생 이어진다. 이 질문은 나를 지으신 이가 어떤 분인지 알 때 비로소 해결된다. 존재의 소리를 용납하고, 존재의 시작이 누구로부터인지 알 때, 비로소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다. 건강한 인격 형성의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