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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감사, 불평의 제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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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은 내 특기였다. 불만은 취미였다. 내 어머니를 꼭 닮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틈만 나면 신세타령을 했다. “네 애비 봐라. 하여튼 이상한 성격이라니까. 집안일이라곤 도통 신경도 안 쓰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아이고 내 팔자야….”
불평은 아랫집 강아지에게까지 번진다. “도대체 그 장로님은 왜 그러는 거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 그렇게 강아지 묶어두라는데도 풀어놓고 말이야. 강아지도 성질머리가 주인 닮아서 사납기 짝이 없어.” 나중에는 날씨까지 탓했다. “지겨워, 이놈의 비는 언제 그칠지? 짜증나 죽겠네.” 나는 학습된 불평분자였다.
결혼을 했다. 남편은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시어머님을 닮았다. 어머님은 감사를 입에 달고 사셨다. 날씨가 더우면 “곡식 빨리 익겠다” 하셨다. 비가 오면 “먼지 안 날리니 아침에 마당 쓸기 좋겠다” 하셨다. 다리를 다쳤으면서도 “아들 얼굴 볼 수 있어 좋다” 하셨다.
남편은 학습된 감사자였다. 아내의 불평을 들어주는 것이 그에게는 고문이었다. 나는 왜 내 불평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또 불평했다. 이러니 살 수가 없다.
어느 날 남편이 ‘153 생큐 운동’을 시작했다. 매일 한 가지 선한 일, 다섯 가지 감사, 세 번 웃기 운동이다. 처음 몇 주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겨우 하루 1개의 감사를 찾아냈다. 6개월쯤 되니 5개 정도는 거뜬히 찾아냈다. 1년이 지나니 5개쯤은 순식간에 찾아낸다. 내 입에서 불평이 사라졌다. 이제 나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한다.
유가족 정서 돌봄 세미나 ‘애도’를 시작했다. 기독교계에서는 최초의 시도였다, 알려지지 않았으니 사람 모집이 힘들었다. 단 두 명이 참가했다.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와 딸이었다. 그럼에도 감사했다.
감사 하나,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어서. 한 명이었으면 얼마나 더 썰렁했을까. 감사 둘, 그 두 명이 남이 아니라 엄마와 딸이어서. 뒷수습하느라 슬퍼할 틈도 없이 일상으로 돌아간 딸이 어머니와 함께 작업하며 충분히 애도했다, 말개진 딸의 얼굴이 얼마나 감사한지. 감사 셋, 두 명인데도 전혀 실망하거나 포기하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감사 넷, 집중적인 맞춤형 세미나를 진행할 수 있어서. 감사 다섯, 내 남편이 살아 있어서. 
감사는 불만의 제초제다. 이 감사릴레이가 대를 이어 전해지는 유산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