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삼열 목사(사랑의교회)
“그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렘 32:2). 자신의 조국이 멸망한다는 것만으로도 슬프고 고통스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현장에서 서 있었던 선지자다.
백성이 듣기 싫어하는 메시지를 전하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충격적이고 있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고, 이스라엘은 그분께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시고, 이방의 신들은 참된 신이 아니요 우상일 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 신보다 약하시다는 의미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백성에게 멸망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했고, 이후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첫째는 예레미야가 선포한 내용이었다. 그는 “왕과 백성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사시리라”(렘 27:12)며 바벨론을 섬길 것을 선포했다. 더 나아가 아예 그곳에 정착하라고 외친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렘 29:5~6).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전하기 쉽지 않은 메시지였다. 반면, 백성에게는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가 훨씬 옳게 여겨졌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렘 28: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렘 28:11).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된 거짓 선지자의 예언이 백성에게는 더 그럴싸하게 들렸다.
거짓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과 맞서다
둘째, 예레미야는 메시지의 내용뿐만 아니라 거짓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과도 맞서야 했다. 그는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다며, 이스라엘의 승리를 선포하는 하나냐와 맞서야 했다.
예레미야가 맞서야 했던 거짓 무리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전하는 아합이 있었고, 시드기야도 있었다(렘 29:21). 심지어 예레미야를 미친 자로 여기고, 나무 고랑과 쇠고랑으로 목을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스마야도 있었다(렘 29:31). 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꿈을 증거로 내밀었고(렘 29:8), 확신에 찬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참조 겔 28:10). 더욱이 이 무리에는 자칭 선지자, 복술가와 꿈꾸는 자, 술사, 요술자까지 합류했다(렘 27:9).
이런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어떻게 메시지를 선포하며, 시대를 거스르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인물이 됐던 것일까? 어떻게 거짓 메시지와 거짓 선지자에 맞서고, 하나님의 길을 따를 수 있었을까?
본문은 예레미야의 인물 됨의 첫 번째 모습을 언약에서 찾고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은 인물이었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30:22, 31:1, 32:38).
이 언약은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이다(참조 출 6:7; 레 26:12; 계 21:3 등). 상황과 현실이 어떠하든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 중심에 뒀기 때문이었다. 또한 두 번째 예레미야의 인물 됨은 하나님에 대한 예레미야의 확신과 이해로 알 수 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렘 32:17),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은혜와 능력의 하나님(렘 32:18~23), 그리고 전능의 하나님이셨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이 말씀을 붙든 예레미야는 절망적 현실을 넘어 하나님의 회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예레미야와 함께 거짓에 맞서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