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삼열 목사(사랑의교회)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 이는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게 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그가 바라본 현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함락된 성전과 죽음의 위협을 경험한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 뜰에 머물렀더라”(렘 38:28).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발이 묶여 버린 감옥에서, 함락되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눈물 가득한 두 눈으로 바라봐야 했던 인물이다. 그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 4:19).
오직 여호와만이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요, 만물의 조성자이시며 그 외 신이라 주장되는 것들은 생기가 없는 거짓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업인 이스라엘의 멸망은 신학적으로나 신앙의 논리로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해야 했고, 이들의 멸망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심지어 예레미야는 멸망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포로가 돼 끌려가는 수치와 고통을 직접 겪어야 했다.
예레미야는 이미 죽음의 위협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는 “이 사람을 죽이소서”라고 외치는 권력자들의 고소를 받아 진창으로 된 구덩이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려야 했고,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는 반역자로 몰려 두들겨 맞으면서 뚜껑을 씌운 웅덩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또한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으며, 유력자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렘 4:23~26). 그야말로 흔들리는 터전 위에 있었던 예레미야는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선지자로 살 수 있었을까?
절망을 넘어서는 믿음으로
그가 어떤 인물이기에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히고, 여호와의 성전이 무너지는 현장을 목도하면서도, 담대히 말씀을 선포하는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일까?
첫 번째로 그는 하나님을 전능자로 아는 현재적 믿음의 인물이었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예레미야가 들은 이 말씀은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부부에게 주셨던 말씀이었다. 예레미야는 절망과 고통의 현장 한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하지 못하실 일이 없음을 믿었다. 그의 믿음은 과거 아브라함 부부에게 후손을 약속하시고 성취하신 하나님께 근거한 것이었다. 이런 믿음은 눈앞에 펼쳐지는 절망의 현실에서도 예레미야를 믿음의 사람이요, 말씀 선포자로 서게 했다.
두 번째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미래적 믿음의 인물이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3:10~11).
이 말씀은 바벨론에 의해 황폐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으며 거리에 즐거워하는 소리나 기뻐하는 소리, 신랑과 신부의 소리도 없게 된 유다 땅을 향한 회복의 선포였다.
예레미야가 황폐함으로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 믿음의 사람이요 말씀 선포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이루실 미래, 곧 하나님의 종말을 믿음으로 내다보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포로 귀환은 물론 ‘그날과 그때’의 말씀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처음과 같이 되는 온전한 회복’까지 말할 수 있었다.
예레미야가 당한 절망은 측량할 수조차 없을 만큼 큰 절망이었다. 유일하신 참 신이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커다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예레미야는 과거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미래의 하나님을 붙잡으며, 믿음으로 현재를 걸어간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