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삼열 목사
앞은 도도히 흐르는 홍해요, 뒤로는 바로가 분노에 차서 ‘선발한 병거 육백 대’를 필두로 모든 병거를 동원한(출 14:7) 군대의 추격, 그 사이에서 바로의 말대로 ‘광야에 갇힌’(출 14:3) 신세가 된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그들 앞에 선 모세.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능력의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했고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출 13:21)만을 따라왔지만, 모세가 당도한 현실은 사면초가였다.
이 현실은 또 다른 분노, 곧 이스라엘 백성의 공분을 낳았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1~12).
하지만 이 사면초가의 현실은 하나님의 크신 일(출 14:31)로 인해 홍해에 삼켜졌다. 드디어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온 백성으로 하여금 이 놀라운 일을 노래로 여호와께 찬양하도록 인도했다(출 15:1~18).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제 그 기쁨이 삼킨 바 되는 일이 벌어졌다. 희열에 찬 노래가 아직 입에서 맴돌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출 15:22~24) 모세를 또 다시 원망하게 된 것이다. 광야의 상황이 어떨지, 장정만 60만 명이 되는 거대한 집단이 준비되지 않은 채 생소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일일지 숙고해 보면 이 원망의 현실을 직면한 모세의 심정이 어땠을지 더욱 절절히 느껴진다.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동일한 위기 속에서 출애굽 백성, 곧 믿음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모세가 보여 준 출애굽 백성이 사는 법은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이었다(출 15:25). 그리고 그 부르짖음의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즉, 쓴물이 단물로 바뀐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는 말씀에서 ‘가리키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율법을 가르친다’는 의미의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출애굽 백성이 사는 법은 므리바에서도 증명됐다.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았고 해결이 되지 않자, 그들은 모세를 향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고 다그친다. 출애굽의 역사를 기뻐 노래하던 일은 어느새 잊고,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한 출애굽 자체를 부인하려 들며 그 일을 인도한 모세를 죽이려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리
이 근원적 위기 속에서도 모세는 출애굽 백성이 사는 법이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임을 보여 준다(출 17:4).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어야 함을 다시 한번 깨우쳐 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마술이라고 착각할 만한 행동이었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은 후 말씀에 순종해 ‘지팡이로 반석을 친다.’
이렇게 사는 법은 메마른 광야를 유랑하는 훈련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의 공격으로 직면한 멸절의 위기 앞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이 아말렉 전투의 위기 앞에서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은 손을 든다. 손을 드는 것은 유대 전통에서 기도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승리가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출 17:11).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는 인물이었다. 기도 이후에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만 따르는 사람이었다. 출애굽 백성이 사는 법을 보여 준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조차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사는 것이다. 모세처럼 믿음의 사람이 사는 법을 배우는 매일의 묵상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