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옥한흠 목사
이 세상에는 낮과 밤이 있다. 석양이 짙어 오고 하루 종일 고달프게 일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와 손발을 씻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으로부터 밤은 시작된다. 밤이 깊어지면 환하게 켜 있던 전깃불은 꺼지고 커튼이 쳐진 아늑한 방 안에서 고단한 하루를 쉴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가족들이 제각기 잠든 시간, 나는 이 밤을 즐긴다. 숨소리조차 들릴 듯 말 듯 고요한 시간은 책을 읽거나 사색에 잠기기에 딱 좋다. 사람이 누리는 축복 가운데 밤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밤은 삶에 쉼을 주는 축복인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공포의 원천이기도 하다. 모든 세상의 악이 암흑에서 탄생하고 모든 무서운 계교가 밤의 침상에서 잉태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밤을 두려워하는 본성이 있다.
그래서 흔히 인생의 황금기를 낮에, 암흑기를 밤에 비유하기도 한다. 건강이 나빠지거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 가정에 근심거리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인생의 밤이 찾아왔다고 한다.
아침에 탐스럽고 싱그러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밤 사이에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름다운 장미 봉오리가 아침 이슬을 머금고 활짝 피어나기 위해서는 어두운 밤 동안 준비를 해야 한다. 밤이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꽃은 밤 사이 피어날 준비를 한다. 그래서 밤의 길이에 따라 피는 꽃의 종류가 달라진다. 만약 밤이 없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꽃을 보기 힘들 것이다.
아침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은 보잘것없어 보일지 몰라도 그 꽃송이를 피우기까지 긴 진통의 과정을 겪어 온 존재인 것이다. 한 생명체의 탄생은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밤에 인생의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어떤 사람은 고난의 밤이 길다. 어떤 사람은 고난의 밤이 짧다. 그 시간이 길든 짧든, 고난의 시간이 없다면 인생의 꽃은 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생의 밤이 찾아올 때면 먼저 감사 기도를 드린다. 밤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고통이지만, 그 후에는 찬란한 꽃이 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밤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만약 인생에 끝없이 낮만 있다면 인간은 무척 교만해질 것이다. 나는 고난의 밤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인생의 밤을 거쳐 아침에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핀 것이리라. 아무리 피하려 해도 우리에게는 반드시 불행의 밤이 찾아온다. 어떤 때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칠 정도로 고난의 극치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밤을 통과하지 않으면 인생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밤은 우리네 인생에서 어쩌면 낮보다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불행이나 고통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나 혼자만 불행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만약 내가 어떤 잘못과 실수를 저질러 큰 위기에 부닥쳤을지라도 이것은 내 인생을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밤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질 수 있다.
홀로 있는 밤을 즐길 때면 가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모두 잠든 시간에 혼자 읊조리는 노랫가락은 자칫 청승맞게 들릴지 모르나 듣는 이 없으니 맘은 편하다. 낮에는 악보를 보고 크고 우렁차게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가족들이 곤히 잠든 밤에는 그럴 수가 없다.
나에게조차 들릴락 말락 속삭이듯이 노래하지만 그 음색은 참 구성지다. 꽃이 만발한 동산에서 꽃을 손에 꺾어 들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는 있지만, 메마른 사막에서 갈증에 시달리며 고통당할 때 과연 마음에서 우러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밤을 만난 인간은 결코 자기 힘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다.
그러나 펌프에 물 한 바가지를 붓고 펌프질을 하면 물이 솟구쳐 올라오듯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밑바닥을 다닐지라도 인간에게는 스스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스스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인생의 밤이 찾아오는 것이다. 물 한 바가지를 부어 주듯 홀로 노래를 부르며 밤을 통과하는 힘을 얻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의 길이 항상 대낮처럼 밝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인생을 걸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밤이 찾아와도 좌절하지 않는가 보다. 오히려 밤에 부르는 노래가 더 마음에 깊이 파고든다.
밤이 지나면 곧 새날이 밝는다. 잠깐의 고난 뒤에는 영원한 행복이 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에 부르는 노래는 아침을 위한 전주곡이며, 어둠이 물러가면 반드시 아침이 밝아 온다는 소망의 노래다. 건강과 재물, 명예와 지위가 갑자기 없어져 인생의 위기를 만날지라도 밤을 통해서 인생의 참뜻을 깨닫고 소망을 노래하는, 지혜롭고 성실하며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밤이 싫어서 두려움에 떨고만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가치 있는 생을 위해 아직은 끝나지 않은 내 인생의 밤을 다시 통과해 보고 싶다. 그리고 밤의 노래를 멋있게 부르고 싶다. 삶이 모퉁이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 주듯이 불행은 결코 불행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며, 그 불행은 영원한 행복을 위한 근원이 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나의 밤을 훨씬 아름답게 한다. 어느새 창 밖에는 희미한 밝음이 어둠을 밀어내며 오늘을 앞세우고 서서히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