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김익겸
‘맨발의 천사’ 최춘선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팔복’ 영상을 통해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버드나무 김우현 감독. 그는 『팔복』 1, 2에 이어 세 번째 이야기 ‘온유한 자’를 기대하던 사람들에게 느닷없이 전 세계 부흥의 현장을 두 눈으로 목도한 『부흥의 여정』을 슬며시 내밀었다. 2007년의 화두이기도 한 ‘부흥’이야기를, 방배동 소비코 건물 지하에 위치한 버드나무 사무실에서 그와 함께 나누었다.
소재를 ‘부흥’으로 옮긴 이유가 있다면_ 원래는 ‘온유한 자’를 진행하려 했다. 성경에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했다. 그런데 땅을 기업으로 얻는 것이 곧 부흥이더라. 그러다 보니 ‘부흥’을 주제로 하게 됐다. 또한 ‘온유한 자’라는 주제가 간단치 않았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은 많은데, 그 의미가 너무 크다. 왜냐하면 예수님 그분이 온유한 분이시기에 더욱 그렇다. 때가 아직 안 됐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이 ‘부흥’이라는 메시지를 보여 주셔서 그렇게 진행했다.
전 세계 부흥의 현장을 다녀본 소감이 어떤가_ 다큐멘터리 취재 형식으로 전 세계 부흥 현장을 보니 남달랐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동일한 아버지 본성과 언약, 말씀에서 나오는 의, 법칙, 진리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걸 느꼈다. 어느 현장이나 그 요소가 있었다. 또한 가장 극명한 현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있더라.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오셨던 것처럼 부흥의 현장은 순수했다.
감독이 생각하는 ‘부흥’은_ 부흥은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성령의 도구, 통로로 사용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지배,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모두는 우리가 복종할 때 가능하다. 자기 것이 많이 없어야 그때 이뤄지는 것이다. 통로에 자기 것이 가득 차 있으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는 순전한 사람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부흥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타시던 나귀처럼 작고 겸손하고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부흥은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처럼 성령이 임하길 기도하라는 것 같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되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
부흥의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었나_ 현장은 흔적만 남았을 뿐 기념비도 없었고, 생각보다 소박했다. 부흥은 섬기는 것이다. 부흥은 그 땅에 대한 축복이기도 하지만, 땅 끝을 지향하고 불을 받아 전해 주는 것이기에 남아 있는 것보다 흩어져 간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 역할이 중요하기에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비우고 무명해지는 게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진정한 부흥을 꿈꾸는 자는 쓰임 받고 역사 속에 조용히 사라지길 바란다.
그런 면에서 『팔복』 시리즈로 유명 인사가 된 것이 부담스러울 것 같다_ 방송하다 교회에 알려지고 말씀을 나누게 되면서, 유명 인사라는 것에서 자유로워졌다.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 본질만 붙들고 가려 한다. 부흥이든 뭐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가 하실 것을 자녀 된 자로서 함께 기뻐하며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나를 비우는 축복을 주신다. 그래서 ‘부담’, ‘열심’ 모두 비워 주셨다. 하나님 영광을 바라고 즐겁게 동참한다. 거룩한 부담감은 남아 있지만, 그래도 자유롭다.
올해가 평양대부흥 100주년인데 ‘부흥’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진다고 생각하나_ 시기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부흥은 시기 상관없이 언제나 갈망, 요청되는 것이다. 지금이 더욱 요청되는 시기이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만 보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보게 하신다. 영국, 미국에서도 100주년이 지났다. 민족적 현실로 국한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 회복이 이때이니이까?”라고 묻는 것과 같다.
우리의 갈망보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교회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사랑으로 역사하신다. 우리는 그 뜻을 닮기 위해 성령을 통해 나를 비워야 한다. 회개는 죄의 고백이 아니라, 아버지 관점으로 내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시간표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공허’가 스며들 수도 있다. 영적 전쟁이기에 사탄이 쏜 화살에 대비해야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부흥 계획이 있으시고, 그 부흥은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하나님의 눈으로 봤으면 좋겠다. ‘1907’은 어게인(again)이 아니라 ‘ing’ 현재 진행형이다. 부흥은 21세기에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은혜다. 새롭다는 것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질에서 멀리 떠났던 것을 회복하는 게 부흥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꿀 수 있나_ 쉼이 필요하다. 내가 꿈꾸는 걸 쉬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시기에 우리는 멈춰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꿈꾸고, 지나치게 일한다. 이걸 내려놓아야 한다. 나의 꿈, 생각을 멈추면 하나님 아버지가 느껴진다. 그러면 그 관점으로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