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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1월

수줍어하시는 하나님

과월호 보기 존 오트버그 John Ortberg

성삼위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고칠 수 있는 자기중심주의

 

무하마드 알리가 승무원에게 “나는 슈퍼맨이기 때문에 안전벨트가 필요 없다”라고 큰소리쳤다. 그러자 그 승무원은 이렇게 말했다. “슈퍼맨은 비행기도 필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는 인간 최초의 유혹이며, 이 유혹은 지금도 가정과 소그룹, 회중 또는 교단까지도 혼미케 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계실 때 그를 따르는 자들 사이에 자주 일어났던 논쟁은 “누가 가장 큰 자인가”라는 문제였다.
자기주장만 내세우거나 모두의 공로를 자신이 가로채거나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았다고 상처를 받는다면, 그는 아마도 자기중심주의self-centeredness나 자기영화주의self-glorification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습과 반대되는 성삼위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고 계시는지 보라. 그중에 누가 가장 “전지”하고, 누가 가장 “편재”하며, 누가 가장 “나이”가 많은지에 대한 다툼이 있는가? 
성삼위의 모습에는 이런 다툼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랑의 “수줍음”
데일 브루너는 성삼위에 대한 에세이를 시작하면서 성삼위의 인격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약에 나오는 성령에 대한 교리나 체험을 공부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수줍음”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성령의 성품이었다. … 내가 말하는 “수줍음”이란 무서움에 떠는 그러한 “수줍음”이 아니라참고 딤후 1:7 오히려 경의를 표하는 “수줍음”이고, 상대에게 모든 관심을 쏟는 “수줍음”이다. 이러한 수줍음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자기중심적 수줍음이 아닌 상대중심적 수줍음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는 사랑의 수줍음이다. 브루너는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는 성령의 사역을 예로 든다. 성령의 사역은 자신에게 관심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관심을 모은다. 아들의 이름으로 오셔서, 아들에 대해 증언하시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사역이 그분의 사역이었다요 14:26; 16:13.
브루너는 성령의 사역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면 먼저 칠판에 예수님을 가리키는 한 사람을 그리고, 칠판 뒤에 서서 팔을 뻗어 한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그림을 가리키면 된다고 말한다.
“그를 보라, 그에게 귀 기울이라, 그에게서 배우라, 그를 따르라, 그를 예배하라, 그에게 헌신하라, 그를 섬기라, 그를 사랑하라, 그만을 생각하라.”
이것이 브루너가 말하는 성령의 수줍음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볼 때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위대하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는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요 8:54.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성령에게 순종해 광야로 몰려 나가셨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가장 극에 달했을 때,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이렇듯 예수님 또한 동일한 수줍음을 갖고 계셨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떠실까? 우리는 공관복음에서 두 차례에 걸쳐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던 요단 강가에서 그리고 변화산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아버지께서는 두 번에 걸쳐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는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나는 그를 즐거워한다. 그에게 귀 기울이라!”
브루너는 아버지 하나님이 “그에게 귀 기울인 후에 나에게도 귀 기울이라. 나도 여기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나의 아들만 너무 생각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 아버지도 수줍어하시기 때문이다. 성삼위 모두가 수줍어하신다. 성삼위께서는 신실하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은혜 안에서 서로를 지명하신다.” 
나는 하나님을, 자신이 신이기에 자긍심이 강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존재인 듯 생각하며 자랐다. 하지만 성삼위에 대한 교리는 하나님의 성품이 그와 같지 않음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 아들로, 성령으로 한 공동체 안에 존재하신다. 그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은 겸손과 섬김과 상호 순복과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기쁨을 보여 주신다. 삼위이시지만 하나이시다. “하나 됨”oneness은 하나님의 징표이기도 하다. 성삼위 모두가 “수줍어”하신다.

희생적 성삼위
하나님은 서로-아버지, 아들, 성령-를 향해서만 놀라운 겸손을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보여 주신다. 일례로,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 얼마나 큰 값을 지불하셨는가?
아들은 “하늘을 떠나 땅으로 가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저 정말 좋은 지역남부 캘리포니아을 떠나 그에 비하면 열악한 지역시카고으로 가겠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사는 동안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들은 자발적으로 영원토록 알고 지내셨던 완벽한 “하나 됨”을 뒤로하시고, 갈라지고 고립되어 있는 인간이 되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루터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음”을 경험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지만 아들만이 값을 치른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내 아들을 내놓겠다. 그가 부서지고 배척당하고 죽임 당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와 영원히 완벽한 ”하나 됨“을 알았던 내가 그와 헤어지는 고통을 짊어지겠다. 내가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을 알리라.”
성령 또한 값을 치르셨다. 성령은 말씀하신다.
“내가 땅에 쏟아지겠노라. 가장 조용하며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인도하고 지도하겠다. 나 자신을 절대로 높이지 않으며 항상 아들만을 증언하겠다.”
큰 그림에서는 성령의 의향이 무시되거나 부정될 것이다. 신약의 언어를 빌리자면 성령은 근심하실 것이다. 성령은 영원을 통틀어 근심해 보신 적이 없으시지만, 이제 매일, 그리고 세기에 세기를 거쳐 근심하실 것이다.
“우리의 교제 안에 거하기 원하는 그 어느 누구든지 내가 그를 위해 이 대가를 지불하겠다”라고 성령은 말씀하신다.
물론 성삼위의 내적 모습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이 모두 그러하듯, 성삼위께 인간적 감정을 결부시키는 것은 그저 비유에 그칠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간들의 불신으로 인해 근심하신다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이다. 호세아 11장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스라엘의 불신에 대해 구구절절 말씀하시고, 이에 따른 합당한 심판을 말씀하신 뒤에 주님은 말씀하신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가끔 그리스도인들은-신앙생활을 수십 년 넘게 해 온 이들도-성삼위 교리가 왜 그리 중요하냐고 질문한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이렇게 답한다.
성삼위를 진실로 믿음으로 얻게 되는 유익은 하나님께 바른 답을 제출하여 A학점을 받는 수준이 아니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실재인 양 행동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가령 집안에 사과가 몇 개 있는지 또는 돈이 얼마나 있는지 찾아내려 할 때 그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믿음의 유익은 우리가 수학 시험을 통과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훨씬 더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성삼위 교리는 현실의 중심이 분리된 자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랑의 공동체에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렇다면 자기중심적이고 반反연합적인 생각은 틀린 것일 뿐만 아니라 분명 망하게 하는 것이다.
체스터턴G. K. Chesterton의 말을 비틀어 표현하자면, 이러한 현실은 중력의 법칙과도 같다. 우리는 그것을 깨뜨릴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어기면 우리가 깨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