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우은진 기자
미국 워싱턴 주 상원 부의장 신호범 의원. 언뜻 한국인이 미국 상원 부의장까지 오른 걸 보면 굉장히 부유한 집안의 성공가도를 달린 사람이라고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신호범 의원은 자신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느냐고 묻는다면 “오를 수 없는 산과 건너지 못할 강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살아왔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오를 수 없는 산과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넌 방법으로 Why와 How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했던 게 비법이라고 강조한다. 올해 77세인 그가 어떻게 미국 정치계에서 다섯 번이나 선거에서 승리하고 상원 부의장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한 그의 굴곡 많은 인생길을 되돌아보았다.
서울역에서의 거지생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4살 때 어머니를 지병으로 잃고, 아버지마저도 떠나버리자, 외할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다. 외가에서 눈칫밥을 먹고 살았던 그는 6살 때 사촌 조카의 엿을 뺏어 먹다 많이 맞게 되었다. 그 길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그때 ‘나는 왜 부모 없이 살아야 하나?’ 하며, 나중에 크면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도 집도 없이 서울역에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추위에 떨며 잘 때가 많았다. 그때 서울역에서 재원이라는 친구를 만나 함께 역 안에서 살았는데, 추울 때는 껴안고 자는 등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 재원이가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팔다리가 부러져 죽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일본 순사가 와서 사랑하는 재원이를 트럭에 던져 버리는 것이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너무 서러워 하루 종일 울었다.
특히 그 시절 그는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하루는 교실 창문 너머 선생님이 칠판에 쓴 글자를 따라 쓰기 시작했다. 도둑공부를 했다. 그 순간 순사가 와서 도망치는 그를 붙잡고 마구 때렸는데, 그의 손에 든 게 글자를 쓴 종이뿐인 걸 알고 국수를 사줬다고 한다. 그는 국수만 먹을 수 있다면 매일 와서 맞고 싶었을 정도로 굶주린 날들이 많았다. 한번은 전구를 모아 팔아서 아코디언을 샀는데, 너무 좋았다. 그런데 그것 마저도 동네 아이들에게 빼앗겼고, 그는 밤새도록 울면서 자신을 떠난 아버지를 또 원망했다. 그리고 6·25전쟁 기간 동안에는 미군이 던져주는 초콜릿이 맛있어서 자주 노량진에서 동냥질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용산의 한 미군의 도움으로 처음 샤워를 했고, 그런 인연으로 하우스보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열다섯 살이 되기 전 개 같은 인생을 살았다면,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살게 된 하우스보이 생활은 큰 축복이었다고 회고한다.
하우스보이가 되어 미국으로 입양
그 시절 미군부대에서 그는 치과의사인 폴 대위를 만났는데, 다정하고 신앙심과 봉사정신도 뛰어난 미군이었다. 그는 폴 대위를 위해서라면 어떤 힘든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번은 아이스박스가 없어져 폴 대위 몰래 며칠을 고생하며 나무 밑을 파서 물을 보관했고, 이로 인해 시원한 물을 대접할 수 있었다. 나중에 폴 대위는 그가 자신을 위해 고생한 일을 알고 고마워했다. 외로움을 유난히 많이 겪었던 그는 밤만 되면 엄마가 그리워 밤하늘의 별을 세기 시작했다. 한번은 산에서 별을 세다가 혼자 울고 있었는데, 폴 대위가 다가와 그를 꼭 안아준 적도 있었다. 그의 인생은 또 한 번 바뀌기 시작했다. 바로 폴 대위가 그를 입양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흥분이 되었다.
그러나 폴 대위는 군 복무기간이 끝나 먼저 미국으로 들어가고, 그가 써준 편지로 여권신청을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웬일인지 계속 거절되었다. 돈도 백도 없던 그는 자신의 힘으로 여권을 받아보려 했지만 매번 허사였다. 그러다 폴 대위에게 편지를 써서 사정을 얘기하자, 양아버지인 그는 자신이 아는 상원의원의 힘을 빌려 그의 여권을 받아내 결국 3년 만에 미국행 여권을 받게 되었다. 또 미 8군 교회에서 110달러를 모금해 줘 미국행 배 티켓을 구입해 드디어 양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정치인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당시 그는 부산에서 배를 탈 때, 한국을 향해 침을 뱉었다. 다시는 고국 땅에 돌아오지 않을 결심이었던 것이다.
미국 양부모는 그를 정말 많이 사랑했다. 그러나 입양 당시 16살이던 그는 나이가 너무 많아 미국 정규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영어는 너무 어려웠다. 양아버지는 밤늦게까지 그에게 수학, 물리, 과학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영어공부가 안 돼서 500페이지가 넘는 영어사전을 태워 마셔버릴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코피 나는 날이 많았고, 저절로 하나님께 “검정고시가 너무 어려워요, 도와주세요. 그러면 저도 나중에 도와 드릴게요”라며 아기 같은 기도를 드렸다. 결국 1년 6개월 만에 검정고시에 통과했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 이후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하루 3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공부에 한이 많았던 그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양아버지는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양아버지는 그에게 ‘희망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도전의 삶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지금의 ‘폴 신’이라는 영어 이름도 아버지의 성 ‘폴’과 한국어 성 ‘신’을 따서 만들어 주셨다. 훗날 그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게 배려해 준 것이다. 그는 지금도 양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양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으면 아마 깡패보스가 됐거나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걸어 다니는 선거운동’, 미국 정계에 입문
1958년 미 육군 징집을 받아 미군 동료와 미국 식당에 들어간 그는 잠시 주저했다. 왜냐하면 “white only”라고 식당입구에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들어가려고 하자 종업원이 그의 멱살을 잡고 식당 밖으로 쫓아냈다. 그날 밤 부대에서 밤새 울면서 “하나님, 저는 왜 차별만 받는 겁니까?” 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이 일은 훗날 그가 정치 지도자가 되는 운명적 사건이 되었고, 차별적 법 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하면 된다, Can do’ 정신으로 미국에서 공부했다. 기회는 뭔가 노력하고 있을 때 온다는 것을 그동안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브림감영대학과 피츠버그대학에서 공부하고, 워싱턴주립대학에서 동양학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그리고 하와이대학, 메릴랜드대학, 워싱턴주립대학 등에서 31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동양사와 국제정치, 세계문화사에 대해 강의했다. 그렇게 교수로서 자신의 꿈을 이룬 평범한 삶을 살 뻔 했다.
1987년 4명의 주지사가 바뀌는 동안 대학교수로서 자문 및 통역관, 무역사절단으로 성실히 섬겼다. 그런데 어느 날 주지사가 그에게 하원에 출마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동양인에다 인지도도 약했고, 자금력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것뿐이었다. 당시 네 켤레의 신발 밑창이 다 닳을 정도로 2만 9천여 개의 집을 방문했다.
하루는 한 신문기자가 걸어 다니며 선거운동 하는 그를 밀착 취재했다. 그는 몇 시간도 못 쫓아다니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어떻게 집집마다 힘들게 방문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다리는 ‘made in korea’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날 주일 아침 신문에 그의 걸어 다니며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독특한 선거방법이 지면의 1/3을 차지하며 대서특필되었다. 그의 당선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번은 한 노인의 집에 문을 두드리자 집주인이 “오리엔틀, 나는 오리엔틀이 싫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소리친 일이 있었다. 그는 분노가 들끓었지만 노인에게 차분히 ‘미국은 이민의 나라이며, 지난 30년 동안 미국 시민으로 살면서 대학에서 교수도 하고 가정도 갖게 되었으며, 세금도 잘 냈고, 이제 뭔가 보답을 하기 위해 정치를 하려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미안하다’며 오히려 그날 이후부터 최고의 선거참모가 되어 선거운동을 해줬다. 어떤 유권자는 ‘우리 개가 당신을 물었으니 찍어주겠다’고 약속했고, 어느 유권자는 ‘우리 집을 방문해 줘서 고맙다’고 같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기도 했다.
신호범 의원은 “나의 인생에도 중요한 순간마다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주셨고, 그 만남을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니까 좋은 기회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뿌리 찾기, 부모와 동생들 미국으로 데려와
그는 하원에 당선된 이후, 가장 먼저 자신의 뿌리 찾는 일을 했다. 문득 그는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왜 나를 버렸을까? 아버지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수록 눈물이 났다. 그의 아내는 밤마다 우는 남편이 의아해서 왜 우느냐고 물었고, 어느 날 아버지를 찾아보라며 그에게 비행기표를 내밀었다. 입양 후 처음으로 고국을 찾은 그는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영등포에 살고 있는 아버지를 찾았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새어머니와 이복동생 다섯 명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배신감을 느꼈고, 들고 갔던 선물들을 내팽개치고 집에 돌아와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서울역으로 갔다. 어릴 적 의지하던 친구 재원이가 생각났다. 그는 “재원아, 내가 왔다” 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는 지금도 한국에 오면 서울역에 가서 친구에게 꼭 인사를 한다.
막상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동생들 생각이 났다. 그 이야기를 하자 아내는 “내가 돈을 벌 테니, 동생들을 데려와 공부시키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는 가난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던 동생들이 안쓰러워 다섯 명의 이복동생들을 모두 미국으로 데려와 뒷바라지를 했다. 모두 검정고시를 보고 좋은 대학을 졸업했으며, 지금은 모두 다 잘 되었다.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나자, 자꾸 고국에 계신 아버지 생각이 난 그는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질문 하나 하고 싶어요. 왜 저를 버리셨나요?” 그러나 아버지는 다음날 새벽 5시에 술에 취해 들어오셔서 말씀하셨다. “그때는 너무 가난해서 너를 먹여 살릴 수 없었다. 일본으로 징병과 머슴으로 팔려갔다. 널 일부러 버린 게 아니다.”
그는 그 말을 들은 후, 아버지를 용서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새어머니도 미국으로 모시고 와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4년 7개월을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그에게, “너의 하나님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고맙다고 전해 줘라”라는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약자의 편에 선 정직한 정치인, 5선에 성공
그는 하원에 당선된 뒤, 동양인을 ‘오리엔탈(Oriental)’이라고 부르던 당시 미국 법을 ‘아시안(Asian)’으로 바꾸는 법안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오리엔탈인은 영국 사전을 보면 ‘눈이 생선같이 작고, 키가 작으며, 이상하여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차별적으로 쓰여 있었다. 이는 미국 사회 내 동양인에 대한 차별적 의식까지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법안이 1999년 통과되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셋째 아들이 찾아와서 아버지가 흑인인권을 위해 싸웠던 것을 이야기하며 축하해 주었다.
또 일본에서 온 야마시다 변호사의 자격증을 복권시켜 준 일이나, 밤늦게라도 교포들이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기 일처럼 달려와 해결해 주는 등 워싱턴 주 교포사회에서 신호범 의원의 신세를 지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는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당선되었고, 심지어 반대당 의원의 추천으로 상원 부의장의 자리까지 선출되었다. 그의 도덕성과 정직함, 성실함을 반대편 정당의 의원들까지 인정해 줬기 때문이다.
그는 5선 출마시 나이가 이미 70대로서 많았고, 당시 소속당인 민주당의 상황이 많이 안 좋아서 출마를 안 하려고 했다. 걱정이 많이 됐지만 열심히 또 선거운동을 한 결과 당선되었다. 그는 ‘아마 공약들을 약속한 대로 잘 지키고 열심히 의정활동을 했던 것을 유권자들이 알아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당선된 뒤에도 인권법, 이민법, 노인 복지법 등을 개선시키는 데 노력했다. 폴 신 의원은 의정활동에 있어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법안의 효력이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이 법안을 선하게 여기실 것인가?’ 등이 그것이다. 이제 임기가 4년 남았다. 나이도 많고, 동양인이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 유권자들은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바로 자신의 이권보다는 주민들을 위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입양과 젊은 정치지도자 양성에 힘쓸 터
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던 그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가난했던 우리나라가 이제 세계 10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것을 감사해 한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를 도와줬던 참전 용사들을 위한 참전 용사비 건립과 흥남전투의 실화를 바탕으로 <아~! 흥남: 자유를 찾아서>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소개했다.
특히 미국 사회 내 정치에 뜻을 둔 젊은이들을 양성하는 일과 입양아들을 섬기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자신이 입양아 출신이고, 뒤늦게 정치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오바마라는 흑인 대통령도 나왔다면, 30년 후에는 한국인 미국 대통령도 나올 수 있다”며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꿈을 크게 갖고 정치와 유학에 관심이 있으면, 정치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키우는 데 노력해 보라”고 격려했다.
그는 빌 게이츠와 이웃에 살며 인사를 나누는데, “그는 남이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로 돈을 벌어 성공했고, 지금은 그 돈으로 세계를 돌며 기아와 에이즈 치료를 위해 쓰고 있다”며, “어릴 적부터 항상 why와 how를 갖고 질문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때 위기 밑에 기회가 온다”며, “질문하는 사람이 역사를 움직이므로 우리나라 청소년들도 질문을 자주 던지라”고 조언했다.
몇 년 전 그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에 선정되어 다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60년 전 부산에 침을 뱉으며 고국을 저주했던 것을 사과했다. 그는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나누지 못하고, 더 봉사하지 못한 것이 제일 후회된다. 21세기를 더 보람 있게 살아가려면 큰 꿈을 갖고 도전하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