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옥한흠목사
무던한 부부지간에도 가벼운 말다툼쯤은 있게 마련이다. 도에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이것은 없는 것보다 낫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가벼운 입씨름이 자칫 무미건조해지기 쉬운 부부 관계에 활력소 구실을 하기도 한다. 부부 사이의 말다툼도 오래 지속하다 보면 단골 메뉴가 생기기 마련인데, 그중 하나가 자녀에 관한 문제다. 자녀는 부부의 합작품이니만큼, 부모 중 어느 한 사람을 닮거나 두 사람의 특성을 적당히 섞어서 닮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부모가 모두 조금도 나무랄 데 없는 완전한 인간이고 자녀 또한 그런 부모를 완벽하게 닮는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것은 한낱 욕심일 뿐이다. 외모나 성격, 학교 성적까지 부부를 공평하게 닮았음에도 자녀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발견될 때면 서로에게 원망의 화살을 날리게 된다.
인간은 평생 동안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산다. 그 기대는 가정을 중심으로 점점 커지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좀 더 여유 있게 살아 보려는 기대, 좀 더 단란하게 살아 보려는 기대…. 그리고 부부가 공통적으로 가장 큰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은 누가 뭐래도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맹목적이라고들 한다.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막상 부모 입장이 되면 그 다짐은 처절하게 무너진다. 큰 기대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덧 자녀에게 턱없는 기대를 걸어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모의 본능인가 보다.
자녀는 부모의 연장체이다. 비록 몸은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가 하나의 생명체로 독립했지만, 생명의 근원은 항상 부모에게 있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따지고 보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따라서 자녀의 정신 속에는 부모를 닮은 부분이 상당히 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또 부모와 전혀 다른 부분도 있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의 단점을 고쳐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부모가 지나치게 자녀를 간섭하는 것은 자신들이 물려준 단점에 대한 보상심리일 것이다.
그것이 악의가 아님에도 자녀는 부모의 그러한 간섭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자녀에게 쏟는 나의 욕심을 억제하려 다짐하기도 한다. 자녀에게 거는 기대도 마찬가지다. 나는 자녀에게 성의를 다할 뿐, 그들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든 그 방향을 내 의도에 맞추려는 욕심을 버리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도, 그들의 자유를 위해서도 이익이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로서 나는 아들들이 영 못마땅할 때가 많았다. 지금은 모두 장성했지만 어릴 때는 아이들도 나를 이해 못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다른 아버지들처럼 사업을 했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른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는 일에만 신경 쓰고 가족에게는 무관심한 듯 보였던 아버지에게 섭섭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자기만 가지고 야단치는 것 같은 서운함까지…. 아이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자녀 교육이 어렵다고 해서 부모 된 책임을 벗을 수는 없다. 자식을 낳았으면 책임져야 함이 마땅하다. 자녀 교육은 곧 인간 교육이다. 자녀를 가르치는 일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지 제품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되라고 하는 교육이지 성공하라고 하는 교육이 아니다. “네가 인간답지 못하면 아무리 성공해도 네 인생은 실패작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며 자녀를 키우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서 많은 부모는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되어라”가 아니라 “성공해라”로 자녀를 몰아붙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왜 오늘날 부모는 자기만족을 위해 자녀 교육에 지나치게 매달려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치닫는지 생각해 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기가 가진 한계에 점점 불안함을 느낀다. 더욱이 직장이나 가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심리가 불안해진다. 이럴수록 부모는 자녀 교육을 자기 스트레스나 욕구 불만을 푸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될 소지가 대단히 많아지는 것이다. 자신의 욕구 불만이나 꿈을 대신 이루어 줄 대타로 자녀를 이용하는 부모가 적지 않다. 어린 자녀를 무대 위의 스타로 만들거나, 오로지 공부에만 목매게 하여 일류 대학에 보냄으로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려 한다. 자녀를 통해 자격지심을 해소하고 인생을 보상받으려는 의식이 그들 마음에 가득하다. 이런 부모는 일류 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며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도식을 가지고 자녀를 가르치기 때문에 자녀의 가치관마저 왜곡시켜 버린다.
어떤 학자는 오늘날의 학교 교육을, 일렬로 서 있는 빈 병들이 힘없이 돌아가고 있는 음료수 공장의 생산 라인에 비유했다. 누구나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각자 주어진 개성과 개인차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무시된 채 하나의 생산 라인을 따라 똑같은 공정을 거쳐 상품으로 출시되는 음료수처럼, 모든 학생을 똑같은 규격의 상품으로 만들고 있음을 꼬집은 것이다.
이런 학교에서는 성적이 나쁘면 불량품 취급을 받는다. 이런 가치관이 규정화된 사회에서는 성적이 나쁜 아이는 부모를 실망시키는 불효자이며, 미래가 없는 인생이 되어 버린다. 어떤 인간이 되는가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렇게 되면 자녀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자녀를 점수로 보고 성적으로 보지,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부모는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착각한다. 부모의 의식구조가 이렇게 변질되어 있는데 자녀의 가치관은 또한 얼마나 타락했겠는가.
얼마 안 있으면 세상의 부모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아니, 벌써부터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적 오르는 것이 최고인 양 가르치며 자녀가 좋은 학교에 진학했다고 춤추는 부모. 그들의 자녀는 남들에게 자랑스러운 상품은 됐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훗날 그 부모가 받게 될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와 이 나라, 이 세계가 치르게 될 것이다. 자녀를 사람으로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무조건 잔소리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부모가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자녀가 얼마나 부모 말 잘 듣고 아름답게 자라는지는 부모가 얼마나 떳떳하게 자녀를 대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가 내 욕심대로, 내 욕구대로 되지 않아도 좋다는 마음이 부모에게 있어야 한다. 자녀의 인생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하려던 욕심을 포기하는 것이 바로 부모로서의 희생이다.
“얘야, 네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데에는 다른 뜻이 있는 거야. 너에게는 다른 장점이 많잖니.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네가 자신 있는 길로 갈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자녀를 위해 진정한 희생을 보여 주는 부모일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방법으로 자녀를 훌륭한 제품으로 만들 것인가, 부모로서 자녀를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