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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6월

사랑의 빚

과월호 보기 옥한흠 목사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면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느 화장실을 이용하더라도, 무슨 낙서가 되어 있는지, 위생 상태는 어떤지, 화장지는 어떤 것을 쓰는지 등 이것저것 잘 살펴보곤 한다. 화장실은 그 나라를 보여 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부산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갔는데, 여느 때와 같이 출발하기 전 공항 화장실을 이용하게 됐다. 역시나 그때도 화장실 주위를 살펴보고 있는데, 벽에 붙여 놓은 스티커 문구가 눈에 띄었다. “에이즈를 추방하기 위해 ○○을 사용합시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욕망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 가고 있는지, 현재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인류 역사를 통해 88개의 문명이 탄생하고 번성했다가 쇠퇴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이 문명의 발생과 번영, 몰락에 대해 연구한 결과, 88개 문명의 몰락은 그 원인과 형태 등 유형이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유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문명이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어 몰락하기 직전에 이르면 가정이 붕괴되고, 부부가 이혼하는 것을 예사로 생각하게 되며, 성적으로 몹시 문란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88개의 문명이 몰락할 때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도 그때와 그리 많이 다른 것 같지 않다.
특히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사고의 변화를 보면 더욱 그렇다. 요즘 사람들은 사랑을 생각하면 낭만보다는 쾌감을 먼저 떠올리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을 두고 누군가 현대인들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사랑이란, 전에는 결코 느껴 본 일이 없는 느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느끼는 느낌이다.” 느낌을 극대화한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느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이런 사랑으로 과연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말 그대로 사람이 사람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한두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다. 홧김에 모르는 사람을 이유 없이 죽이고, 혼자 죽기 억울하다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조차 경시하는 것을 보면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지고 있으며, 그 존엄성에 대한 관심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미 생명 불감증에 걸려 있는 우리는 만원 지하철 안에서 내 발을 밟은 이웃을 쌀쌀한 눈초리로 쳐다볼 수는 있어도,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쳐다보지 못한다. 어쩌면 마음으로는 벌써 수백 번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려고 결심하면, 그 결심은 반드시 사랑하는 태도와 행동을 낳는다. 그 의지 앞에서는 감정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빚진 자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빚은 갚아야 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생을 결단하는 결심이라면 그는 평생을 두고 얼마를 갚아도 반드시 빚을 갚는다.
빚진 자가 빚을 갚아 그로부터 해방될 수 있듯이, 사랑을 함에 있어서도 빚진 자의 심정을 회복하여 의지적으로 결단을 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빚을 갚는 것이 강한 의지와 결심이 필요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면 그것을 갚아야 함은 당연한 도리다. 그래야 자신의 신용을 지킬 수 있음은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 데 뒤탈이 없다. 그러나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꾸어 갈 때는 천사요 갚을 때는 악마라.” 요즘 세상에 딱 들어맞는 속담인 것 같다. 꾸어 갈 때는 천사가 되지만 갚을 때는 악마가 된다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빌릴 때는 아쉬운 마음에 간이며 쓸개며 다 빼 줄 것 같더라도 막상 갚을 때면 잊어버리거나 입을 씻어 버리려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적지 않다는 말이다.
한번 빚을 지게 되면 빚에 대한 부담 때문에 자의든 아니든 악의를 품을 만한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웬만하면 빚을 지지 말되,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우리가 평생 갚지 못할 빚이기 때문에 빚 가운데 가장 큰 빚이라 할 수 있다. 빚진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사랑을 빚에 비유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만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가? 한평생을 독불장군으로 혼자 살 수 없듯이, 우리는 하루하루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존재다. 죽으면서도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가는가?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랑을 입고 죽는지는 상가(喪家)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많은 사람이 문상하느라 오가고, 많은 사람이 잠도 못 자고 씻지도 못하고 며칠 밤을 지새운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사랑의 봉사를 해야 무덤까지 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중에 한 사람도 사랑받지 못했다고 할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일이 없기 때문에 남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없다”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나 빡빡하고 피곤한 인생인지 모른다.


그러면 사랑의 빚을 졌을 때,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 큰돈을 빚지고 사는 사람은 밤낮없이 빚 걱정만 한다. 눈만 뜨면 빚 갚을 고민을 하고, 눈만 감으면 빚쟁이에게 쫓기는 꿈을 꾸니 밤낮 빚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빚도, 눈만 뜨면 ‘사랑해야지. 어떻게 사랑할까’ 궁리하고, 눈만 감으면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 얼굴이 떠올라야 한다. 마치 빚진 사람처럼 밤낮없이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누가 나에게 섭섭한 일을 해도 ‘내가 사랑을 덜 해서 그렇구나. 내가 더 사랑해야 되는데, 사랑했더라면 저렇게 안 했을 텐데’ 생각하며 늘 빚진 사람의 심정으로 이웃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빚이다.
아직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사랑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매일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중에는 나와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감정의 사랑이 아닌 의지의 사랑을 해야 한다. 항상 ‘나는 사랑해야 될 사람이야. 사랑의 빚을 지고 있어’라고 생각하면 그 생각은 사상이 되고 곧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누구든 천하가 무너져도 이루겠다고 결심하고 달려드는 일은 언젠가는 꼭 해낼 수 있으므로 우리도 완벽한 사랑에 한번 도전해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