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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7월

사랑은 순종이다

과월호 보기 옥한흠목사

요즘 같은 시대에는 혈통이나 가문으로 인정을 받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 민족은 여러 이유로 가문을 많이 내세웠으며, 조상이 누구다, 우리 집안에 어떤 인물들이 났다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삼았다. 그래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은근히 부러워하기도 했다. 사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녀들이 교육을 잘 받고, 사회나 국가에 기여를 많이 한 가문은 그래도 어딘가 조금은 다른 데가 있긴 하다. 소위 좋은 가문은 대대로 사람들이 고상하고, 점잖고, 사회 여러 부분에서 탁월한 두각을 나타낸다. 아무리 혈통이나 가문을 따지지 않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같은 값이면 가문이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훨씬 낫다. 나와 같이 가문이나 조상 덕을 볼 만한 것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한 사람들은 그만큼 혜택을 누리며 산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3남 1녀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지게 지는 법, 농사짓는 법, 나무하는 법, 소 먹이는 법 등을 배웠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농사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우리 아버지가 하시던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내 아버지가 하시던 일이라면 자녀인 내가 그것을 물려받는 것은 전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동네에서 대대로 설렁탕 집을 운영하는 집안의 사람들이 나보고 부엌에 가서 진국을 끓여 설렁탕을 만들어 팔라고 하면 나는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은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받아들이고 기쁘게 할 수 있는 근원이 내 안에 있다. 그 힘을 확인할 때면 ‘아, 나는 우리 아버지 자녀가 분명하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한 가족이 되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어렸을 때 헤어져 한참을 따로 살다가 수십 년 후에야 만난 가족도, 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에 떨어져 살다가 이제야 상봉한 이산가족도 서로 가족임을 확인하는 순간 사랑하게 된다. 가족을 위하는 일 앞에서는 너나 가리지 않고 한마음이 되며, 가문의 체면과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한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소속감이 있다면 가족과 가문을 위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우선 자기를 낳아 준 부모를 사랑하게 되고 형제들을 사랑하게 된다. 물론, 남은 사랑하면서 가족은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긴 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끼리는 그야말로 입 안에 있는 것도 내어 줄 만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부모 형제와는 등을 돌리고 원수를 대하듯 얼굴도 맞대지 않고 사는 삭막한 가정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이 악하여 나타나는 나쁜 현상이지 결코 정상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가족끼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며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가족’을 반드시 사랑해야 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어느 곳에서나 어느 사회에서나 다 통하는 상식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근본이자 나를 낳아 준 부모를 사랑해야 함은 물론이요,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 또한 사랑해야 한다. 형제가 선하든 악하든,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우리는 무조건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형제는 선택하는 대상이 아니며 선택할 수도 없다.
  내 동생은 내가 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내가 좋아서 동생을 만든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누이동생이 생긴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형제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사명이며 책임이라는 말이다. 아버지가 선택의 대상이 아닌 것과 똑같은 이치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낳아 주신 아버지를 보아서라도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낳아 주신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아버지에게 순종한다. 순종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이 또한 온 세상 어느 집안에서도 다 통하는 진리다. 순종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 거짓말이다. 순종과 사랑은 나눌 수가 없다. 아버지를 정말 사랑한다면 순종해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순종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버지를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찬물에 손 한번 담그지 않고 귀하게 자란 한 처녀가 가문 좋은 집으로 시집을 갔다. 가문이 좋고 대대로 전통 있는 집안이라면 새로 맞은 식구를 그 집안사람으로 만들고자 시집살이를 호되게 시키는 경우가 많다. 집안 체통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아무리 귀하게 자란 처녀라도 일단 그런 집안에 시집을 가면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집안일을 한다.
  처음에는 많이 고되고 힘들더라도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 콧노래를 불러 가면서 일을 한다. 어떤 때는 그 어려운 시부모에게 생글생글 아양을 떨기도 한다. 옆에서 보면 고된 시집살이가 전혀 힘들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바로 그 집안 식구가 다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사랑하고 시부모를 사랑하고 시댁 식구들을 사랑하며 한 식구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때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가족을 사랑하고 가정을 위해 헌신한다면, 누구도 자기 집안을 망치려 드는 사람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는다. 가족을 사랑한다면, 자기 가정을 깨뜨리려는 사람을 생명 걸고 막을 것이며 대적할 것이다.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고 가족을 지킬 것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는 바로 사랑과 순종이다. 사랑으로, 믿음으로, 순종으로 하나 된 가정은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