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옥한흠 목사
“일본에게 억울한 일이 많고 내 인생이 하도 원통해서 내가 위안부라는 사실을 밝히게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였던 김 할머니의 한 서린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 TV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김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있노라니 할머니의 한이 내 마음에 전이되어, 나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숨을 몰아쉬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일본을 자주 방문하지만, 일본이란 나라는 왠지 정이 안 간다. 식민지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어도 위안부 할머니들만 생각하면 분노가 끓어오름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그 고통의 잔상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가? 항일투쟁을 하다 잡혀 무섭게 고문당하고 죽은 애국지사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소리 없이 희생당한 순교자들, 강제 징용으로 꽃다운 나이에 이름 모를 전장에서 이유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라는 나라는 아직도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만행을 사실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역사를 왜곡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때만 되면 제1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오만함을 보인다. 날이 갈수록 기세만 등등할 뿐 도무지 잘못을 뉘우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일본에 정말 정이 안 간다. 일본에 자주 가지만 일본말을 절대 배우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을 정도로…. 그것은 민족의 원수에게 아무도 모르게 가하는 나만의 복수요, 응징이다.
세상은 미움에는 더한 미움으로, 폭력에는 더 심한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아 가중시킬 뿐더러, 폭력은 폭력을, 무법은 무법을 가중시켜 더 심한 파괴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어둠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오직 빛만이 어둠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여기서 어둠 속의 빛이란 진실한 사랑, 다시 말해 용서를 의미한다. 용서는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물론 원수까지도. 받을 때만 줄 수 있는 본능적인 사랑으로는 원수를 용서할 수 없다. 내가 낳은 자식, 내 부모, 내 형제는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어도 이 사랑으로 원수까지 사랑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려면 우선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그가 저지른 잘못이나 악한 행위를 단지 인정하거나 모른 척 덮어두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악한 행동이 더 이상 인간관계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지 않게 없애 버리는 것이다. 용서는 마음의 짐을 덜어 주고 고난의 빚을 탕감해 준다. 그러나 “너를 용서하겠다. 하지만 네가 나에게 한 일은 잊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진정한 용서란 용서해야 할 사건을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이다.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저질렀던 나쁜 행동이 그와 나의 새로운 관계에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도록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만, 공개적으로 나를 비난하고 나를 파괴하기 위한 흉계를 꾸미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원수를 용서할 수 없다고 단정하기 전에 원수가 나에게 상처를 준 행동이 결코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선 원수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사랑의 눈으로 보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용서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다면 아무도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있다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그토록 나를 괴롭히고 고통의 길로 몰아가는 원수를 도대체 왜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미움이라는 감정이 사람의 영혼에 상처를 내고 인격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미움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내가 미치도록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 감정이 미움 받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야 한다. 그에게는 평생 치유할 수 없는 치명적 상처로 남게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히틀러 한 사람에게 있었던 ‘미움’이라는 감정 때문에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일, 비양심적인 독재자가 수백만 명의 아이들에게 행한 참으로 끔찍하고 무례한 행동으로 우리는 ‘미움’이 가져오는 끔찍한 결과들을 이미 보았다.
이러한 미움의 결과들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것은 자신에게도 치명적으로 해롭다는 사실이다. 미움은 사람의 인격을 좀먹는다. 미움은 사람이 가진 가치와 객관성을 파괴한다. 미움은 아름다운 것을 추한 것으로,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진리를 거짓으로, 거짓을 진리로 교묘히 바꾸어 버린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통해 인류를 악의 구렁텅이로 내몰아 망하게 한다.
이때, 미움의 문제를 치유하고 원수를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중에서 아가페의 사랑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무조건 사랑해 주는 가장 강하고 위대한 사랑이다. 아가페는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이며,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며, 자기를 희생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랑이며,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하는 사랑이다. 열번 백번 똑같은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화가 나면 내가 낳은 자식도 1년 365일 미운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이상적인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사랑을 실천하려는 나를 괴롭힌다. 그 시달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용서의 힘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의 힘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원수가 생기더라도 증오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를 미워하고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원수를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의지를 가지고 용서하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 그러면 나중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원수를 보아도 원수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