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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4월

절망에 빠진 어깨에 사랑의 손을 얹자

과월호 보기 옥한흠 목사

언젠가 폭스라는 사람이 쓴 사랑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사랑은 강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일이 있다.
“충분한 사랑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다. 충분한 사랑이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열 수 없는 문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건널 수 없는 해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다. 근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앞날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이는지도, 매듭이 얼마나 단단한지도,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거대한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충분한 사랑은 이것을 모두 녹여 버릴 것이다. 충분한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전쟁에, 보릿고개에, 말 그대로 사는 데만도 벅찬 시절이었다. 그러나 새 고무신 하나에도 마치 천하를 얻은 것처럼 행복한 때이기도 했다. 새삼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추억에 잠길 때면 마음에 뭔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뜨거운 것이 있다. 당시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지금은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가끔은 어렸을 적 고생을 달콤한 추억으로 되새기며 낭만에 젖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가스보일러를 연탄으로, 광나는 멋진 가죽 구두를 고무신으로 되돌려 놓고 싶지는 않다. 먹을 것이 풍성한 이 시대를 뒤로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다시 올 수 없는 추억일지라도 그때로 되돌아가는 것은 낭만이 아니라 낭패다. 고통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잘사는 재미가 어떤 것인지, 세상이 주는 단맛이 무엇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과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가슴이 찢기는 무서운 고통을 몇 고비는 넘겨야 할 것이다. 사방으로부터 고통이 조여 오는 환경에서 나는 무엇을 가장 절실히 찾게 될까? 무엇이 가장 나를 사람답게 만들 수 있을까? 정신적 위기, 육체적 위기, 아니 그보다 더한 모든 위기를 만났을 때 나로 하여금 가장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하는 것, 나를 다른 사람들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끈은 돈도 명예도 아닌 ‘사랑’일 것이다.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살기 좋아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정 문제, 경제 문제, 건강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하루하루 좌절과 절망 속에서 살고 있다. 급하면 부모자식도 저버릴 수 있고, 믿음도 팽개칠 수 있는 상황이 언제 눈앞에 다가올지 모른다.
이런 때일수록 사랑만이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사랑의 진가는 어려울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부부가 손잡고 팔짱 끼고 다니는 다정한 모습을 보면 아름다운 장미 같다. 그러나 만사가 잘되고 형통해 부부가 더 없는 행복을 느낄 때는 향기를 맡기 어렵다. 장미의 진짜 향기는 깊은 밤중에 맡을 수 있듯이, 부부가 생의 위기를 만나 험하고 좁은 길을 함께 걸을 때 진정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문제가 없을 때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당신과 나는 헤어질 수 없어요” 하던 아내라 해도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생활이 어려워지기라도 하면 남편을 무능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둘 사이에 금이 가면서 사소한 일에도 티격태격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싸우다가 별거하고, 급기야 갈라서는 수순을 밟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그동안의 사랑은 가짜였다는 것인가? 삶에 위기가 닥쳤을 때가 바로 진짜 사랑을 할 때다.

 

그런 진짜 사랑의 표준은 ‘무조건’이다. 잘살 때만 사랑하고 못살 때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살 때나 잘살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 희생하는 사랑이며, 변함없는 사랑이다. 즉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한번 사랑하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는 이 사랑의 표준에 맞추어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거창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사랑할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차라리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쉽다. 이것은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만큼 어렵고 부담스러운 말도 없다. 목사라고 사랑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부터 짚고 넘어가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고민에 빠질 필요가 없다. 거창한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부부나 부모자식, 형제자매 사이에 ‘서로’ 사랑하면 된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각자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형제자매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거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꼭 거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사랑은 가까운 데 있는 사람과 하는 것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 역시 작은 사랑의 실천에서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전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옆에 있는 남편을 보고 ‘여보, 당신을 사랑해요’ 하고 말한다면 나는 남편을 통해 전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고, 동시에 남편을 통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왕 사랑할 거라면 흠뻑 젖을 때까지 사랑하자. 적당히 잠깐 사랑하다 중단하지 말고, 온 집안이 사랑의 홍수가 나서 전부 떠내려갈 정도로 실컷 사랑해 보자.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다. 3일밖에 실천할 자신이 없다면 3일마다 사랑하기로 다시 작심하자. 그러면 그것이 365일이 되고, 한평생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간지럽게 살짝 “사랑해요” 하고 고백한 후 공허한 마음으로 살지 말고 깊은 데서부터 진실한 사랑이 우러나오도록, 그래서 나중에는 “아이고, 그만 사랑해요” 할 정도로 마음껏 사랑해 보자. 그러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나도 모든 일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면서 살 수 있다.
사랑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보다 더 큰 힘은 없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낄 때 그의 인생은 사랑으로 더없이 가득 찰 것이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는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사람의 어깨에 크고 따뜻한 사랑의 손을 얹어 주자. 불안해하는 가족의 어깨에 조용히 위로의 손을 얹어 줄, 사랑의 큰 손을 가지자. 그러면 어떠한 고통이 물밀듯이 몰려와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