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옥한흠 목사
‘사랑’은 누구에게나 한없이 정다운 말이며 매력 있는 말이다. 그 범위도 아주 넓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 자식이 부모에게 바치는 사랑, 부부 간의 사랑, 연인끼리의 사랑, 형제자매 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우정, 불우 이웃에게 베푸는 온정, 하다못해 애완동물을 아끼는 마음까지.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이 모든 것을 사랑의 범주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 많은 사랑 중에서 어떤 사랑이 가장 거룩한 사랑이며, 가장 아름다운 사랑일까? 누구든 사랑 문제 앞에서는 자신 있게 나서지 못할 것이다. 바라는 것 없이 아낌없이 주었나, 헌신적으로 사랑했나, 내 모든 인격을 다 소모하며 한없이 사랑했나,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나…. 이 모든 물음에 고민하지 않고 “네” 하고 대답할 사람은 없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심 없이 사랑하려고 본능적인 감정을 억제하며, 사랑하려는 의지 하나만으로 거룩한 사랑을 해 보려고 시도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감정의 본능 앞에서 무너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이 사랑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기뻐했던 적이 있다. 웃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정말 행복해서 웃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한 적도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사랑을 기대했다. 내 마음 가득히 만족을 주고, 기쁨이 넘치게 하는 사랑을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하고 상처 입고 나서, 여전히 마음속 텅 빈 공간에는 진실한 사랑에 대한 갈증만 일어나는 나야말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진실로 진실된, 마음의 모든 공허와 불행, 근심, 고독, 공포를 송두리째 뽑아 버릴 수 있는 진짜 사랑을 맛보지 못했던 이유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연기나 기침처럼 감추기 어렵다. 또한 오래 감춰 두기도 어렵다. 언덕 위에 있는 동네에 어둠이 내려와 불을 환하게 밝히면, 그 불빛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을까, 손수건으로 막을 수 있을까? 그 빛은 숨기지 못한다. 아무리 가리려고 발버둥 쳐 봐야 새어 나오는 불빛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감추기 힘든 사랑을, 내 주위를 연기처럼 감싸고 있던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서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상처 입은 내가 부끄러웠다. 그 빛과 같은 사랑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심지어 자신에게서 새어 나오는 빛조차 손바닥으로 가리려고 했던 어리석은 사람들…. 사랑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시치미 떼고 냉정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빛처럼 밖으로 새어 나오는 사랑을 막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면, 원하든 원치 않든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을 누리고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 거룩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말이다.
세상에는 많은 딸들이 있다. 그 딸들이 한 번쯤은 이런 말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엄마, 우리 엄마를 이제 좀 이해할 것 같아.”
시집가서 첫아이는 뭣도 모르고 낳아 호기심에서 고생인 줄도 모르고 키우지만 둘째, 셋째 아이는 낮에만 자고 밤에는 사람 못살게 굴고, 끝도 없이 병치레를 하고…. 아이한테 매달려 씨름하다 보면 세상만사가 귀찮아질 정도로 괴롭다. 이럴 때 바로 엄마 생각이 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맺히고, 그제야 비로소 엄마의 사랑을 알 것 같다는 그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하셨던 일을 내가 직접 겪어 보았을 때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만큼 곤란하고 어려운 일은 없다. 마음이 안 가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말이다. 눈만 뜨면 미운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무조건, 누구든지 가리지 말고 진실로 사랑하라는 말을 들으면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그래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그 사랑을 실천해 보는 것이 쉬울 것 같다. 사랑은 아무 관계 없는 사이보다 가까운 사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자주 만나는 사람, 자주 보는 이웃부터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점점 확대되어 잘 모르는 사람도 자연히 사랑하게 되지 않겠는가. 바로 앞에 보이는 사람부터 사랑해야 안 보이는 존재까지도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아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냥 간이라도 빼 줄 것같이 부둥켜안고 호들갑을 떨게 된다. 반면, 한 집에서 살아도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이 있다.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고 이웃에게 온정을 베풀더라도 자기 가족을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다면, 이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한 지붕 밑에서 낮이고 밤이고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멀리 있는 친구를 사랑한다는 둥, 아프리카 난민들을 사랑한다는 둥 하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사랑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으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래서 감출 수 없고 속일 수 없다. 바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부터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 지금 사랑하지 않으면 언젠가 못 다한 사랑을 후회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사랑할 수 없음에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의 씨앗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세상에는 사랑을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사랑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부요한 사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