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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복음을 심고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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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 제물포항에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상륙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는 갑신정변으로 인한 혼란이 야기되고 있었고, 아펜젤러 일행의 진입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도착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었지만 그 선교의 첫걸음부터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펜젤러는 잠잠히 기다리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에게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소서.”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18세에 복음 전도자 풀턴(Fulton)의 설교를 통해 회심한 후, 해외 선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해외 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나서는 ‘내 생애에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평생 주님께 봉사하는 데 완전히 헌신하는 것이다!’라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이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고자 24세에 드류신학교에 입학한 아펜젤러는 본격적으로 목사이자 선교사로서의 전문 훈련을 받게 되었고, 27세에 신학석사가 되었다.
1884년 말, 미국 북감리교회 해외선교부는 마침내 아펜젤러를 조선에 파송할 선교사로 결정했다. 그는 조선의 혼란스러운 정세에도 불구하고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조선행 배에 올랐고, 일본과 제물포에서의 오랜 체류 끝에 1885년 7월 16일, 서울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후 고종의 공식적인 허가 아래 교육사업을 시작한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고, 성서 번역(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각종 기독교 잡지 발행뿐만 아니라 2,900km에 달하는 국내 전도여행, 정동교회 설립 등에 이르는 수많은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의 몸무게에서 30kg이나 줄어 버릴 만큼 이 땅의 복음화 사역에 헌신했던 아펜젤러.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했던 그의 마지막 모습은 1902년,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탄 배가 사고로 침몰하던 순간, 동행한 조선인들을 구하려고 손을 뻗으며 안간힘을 다하던 모습이었다고 한다.

<유민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