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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2월

설 명절에 영적 결단을!

과월호 보기 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그것은 거대한 축제. 이동 인구만 연 삼천만 명이 넘는 온 나라의 잔치. 고속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해 가고 기차는 매번 만석 매진 행렬, 흥행으로 보자면 그만한 대박이 없다. 우리나라 국민이 매년 두 번씩 벌이는 잔치가 있다. 설과 추석이다.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는 이유는 단연 가족애다. 부모님과 집안 어른을 찾아뵙고 안부를 묻는 풍습은 여느 나라에서 찾기 힘든 칭찬할 만한 풍습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으니 바로 차례이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관건이다. “근본도 없는 집안 같으니. 어딜 제사를 안 지낸단 말이냐!” 또는 “제사를 안 지낸다면 그게 상놈이지 정상적인 사람 집안이냐?”며 뼈대 있는 가문 행세를 하기도 한다. 한국 국민은 제사를 목숨처럼 여긴다.

그런데 제사는 어떤 행위인가? 조상을 기억하고 유지를 반추하는 간소한 전통은 점점 조상(귀)신을 모시는 종교 행위로 변질됐다. 그리하여 생사화복(生死禍福)의 전권(全權)을 마치 조상신이 좌지우지하는 듯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조상귀신을 덧나게 하면 삼대가 재수 없다”라는 속담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가르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나아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신 5:7~8).

우리나라에 가톨릭이 전파됐을 때 전주의 선비 윤지충, 권상연은 죽음으로 믿음을 지켰다.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살랐다. 유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이는 죽음을 각오한 행위였다. 믿음의 결단이 아닐 수 없다. 반면 1938년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 참배를 가결했다. 통탄할 오판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한국 기독교는 우상 숭배에 굴복한 전적이 있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그러나 주기철, 손양원 목사를 위시해 많은 신앙인들은 목숨으로 믿음을 지켰다.

이제 곧 설을 맞는다. 민족 최대의 명절임에 틀림없다. 잔치는 화기애애하게 가족과 함께 감사와 행복을 누려야 한다. 그런데 제사는 아니다. 이 점에서 영적 분별력을 확실히 해야 한다. 이제 믿는 자들은 다시 기로에 서 있다. 어떻게 결단할 것인가. 여호수아처럼 고백하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이번 설 명절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절기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