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주성 대표총무(국제제자훈련원)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비다. 그렇기에 때때로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 의심할 때가 찾아온다. 이 의심은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질문이기에 ‘존재론적인 의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존재론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학문적인 질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같이 느껴지고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어 왔던 모든 것에 의심이 드는 상황만큼 그리스도인에게 버거운 짐은 없다. ‘존재론적’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이 ‘영혼의 밤’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매우 개인적이고 불편한 과정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 번,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영혼의 밤을 경험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강력하지는 않지만 지진 후의 여진처럼 반복적으로 이 갈등을 경험한다.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될 때 그리스도인은 딜레마에 빠진다. 기독교 역사학자 롤란드 베인튼은 “영혼의 밤의 진정한 본질은 그 원인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어쩌면 그것은 이전부터 우리 안에 쭉 존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의심에 빠지면 다른 그리스도인은 다 멀쩡한데 자신만 의심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 또 이런 고민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도 없는 상황에 난감해 한다. 그리고 이런 시험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된다.
그러나 의심과 회의는 다르다. 의심하는 사람은 기독교 전통 ‘안에서’ 자신의 신앙 문제로 갈등한다. 회의론자와 구도자는 기독교 전통 ‘밖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심각한 의심에 빠졌다고 해서 아웃사이더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독교 전통이라는 풍부한 신학적 자료들이 있다. 이번 달에 묵상하는 시편과 『기도해 보라는 뻔한 대답 말고』(국제제자훈련원 역간)도 그런 자료 가운데 하나다.
의심하는 것에는 책임이 없으나 의심에 대한 반응에는 각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의심을 인정하되 그것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의심을 떨쳐 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저버리게 된다면 스스로 무력한 희생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 별 의미가 없어질 때에는, 애당초 심각하고 골치 아픈 의심은 생기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