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김상란 성도(용산구 산천동)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무너졌다. 그러나 무너진 몸을 일으키려는 마음 또한 거의 반사적이었다. 마음은 의지를 동반했지만 결국 통증이 이를 무시한 채 전신을 지배하는 가운데 나는 히스기야를 생각했다. 그가 면벽하고 통곡하며 기도했던 열왕기하 20장. 그렇게 구약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팔순을 앞둔 친정어머니로부터 <날마다 솟는 샘물> 3월호를 받았다. QT는 마태복음부터 시작되었다.
QT를 통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으시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묻고 또 물으시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구약과 신약을 매일 읽으면서 내가 살아왔던 방식, 고집하는 특정한 가치관 등에 붙박이지 않고, 탈주선을 그리며 삶 전체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 20년 만에 처음으로 병가를 받아 두 달간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때, 많은 시간을 들여 말씀을 읽고 가슴으로 느끼며 손으로 쓴 QT는 <날마다 솟는 샘물>의 빈 공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이때부터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은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해 그들을 멸하게 될까봐 가나안에 동행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때 우리는 불신하기를 밥 먹듯 하는 목이 곧은 자들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으셨냐면서 함께 가 달라고 모세가 떼를 쓰듯 기도하자, 결국 친히 가겠노라고 돌이키시는 하나님. 그분의 한없는 긍휼과 자비를 묵상하며, ‘하나님이 이처럼 나를 사랑하셨구나’를 새삼 전율하며 느꼈다.
창세기에서 애굽 총리가 된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며 자신을 이곳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묵상할 때, 나는 하나님께 대한 참다운 사랑 고백을 요셉을 통해 다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통곡하며 울었던 대목은 이사야 53장 4~6절에 나오는 ‘우리 죄로 인한 고난’이었고, 고린도후서 11장 22~29절‘바울이 자랑하는 근거’였다.
바울은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을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해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강과 강도의 위험, 그리고 동족과 이방인과 시내와 광야와 바다와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다.
또한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로지 교회를 염려할 뿐’이라는 바울의 고백 앞에서 흐르는 내 눈물엔 까닭이 없었다.
왜 이다지도 가슴이 찢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펑펑 울었다. 그렇게 나는 목 놓아 울기를 한참 동안 그치지 못했다. 그리고 열왕기하 20장을 다시 읽으면서 신구약 일독을 마치게 되었다.
어느 저녁, 커피점 주인이 원두를 분쇄하는 동안 나는 잠시 의자에 앉아 밖을 보게 되었다. 퇴근 무렵이라 시멘트 건물 속에 있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봄기운이 무르익어 상가의 문들은 활짝 열려 있었고, 저녁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전등의 꽃들도 피었다.
바쁘게 굴러가는 자동차, 어딘가 목적지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뭔지 모를 삶의 애환이 느껴졌다. 퇴근 후 서둘러 반찬 가게를 들어가는 내 모습도 환영처럼 보았다.
순간, 바쁘게 돌아갔던 내 일상에서 탈주선이 된 병가가 휴가처럼 생각되며 감사가 절로 나왔다. 병가가 아니었다면 어찌 내가 성경의 맥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읽으며 벅찬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었겠는가?
아픔은 나에게 충분한 유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