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탐구

2019년 09월

고린도와 바울의 운명적인 만남

성경인물탐구 주영관 목사 (너머서교회)

영적으로 타락한 고린도
고린도는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가 만나는 잘록한 지점에 있다. 2004년에 2km가 넘는 리오-안티리오 다리가 개통되기 전까지 본토와 반도를 잇는 육로는 고린도를 통해야만 했다.
고린도의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항구가 있었다. 배들은 한쪽 항구에서 짐을 내린 후 육로를 통해 다른 쪽 항구로 짐을 옮긴 다음, 다시 배에 실어서 항해를 하곤 했다. 많은 암초와 폭풍으로 인한 파선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거대한 반도를 돌아가는 것보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러다 고린도의 양쪽 항구를 잇는 6km짜리 운하가 뚫렸다. 짐을 내리지 않고도 반도의 반대편으로 갈 수 있게 됐지만, 운하의 폭이 좁아 작은 배만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운하가 1893년에 개통됐으니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에는 당연히 많은 내외국인들이 고린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어서 행정, 상업, 숙박업 등이 발달했고, 유흥 문화 또한 엄청났다.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를 비롯한 여러 신(神)들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는데, 신전에서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종교적 매춘이 행해지곤 했다. 이런 곳에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웠다.


바울의 before & after
바울은 원래 예수님의 제자와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집집마다 들어가서 신도라면 모조리 잡아 감옥에 넘겼다. 그러다 아예 교회를 완전히 없애 버리기 위해 대제사장의 허가증을 받았다. 그런데 허가증을 갖고 다메섹으로 향하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님의 사도가 됐다.
사도가 된 바울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전도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정했다. 바울은 총 세 번의 전도여행을 떠났는데, 그중 두 번째 전도여행에서 고린도를 방문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18개월 정도를 머물며 복음을 전파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 회당을 자주 이용했다. 유대인이 있는 도시에는 대부분 회당이 있었고, 안식일에는 그곳에 유대인이 모였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유대인의 반대도 많았다. 고린도에서도 유대인의 핍박으로 인해 바울은 회당 바로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때 꽤 많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중에는 회당장도 있었다. 덕분에 고린도라는 큰 우상의 도시에 교회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고린도는 바울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도시지만, 바울이 떠난 후 이곳에는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결혼 문제, 우상 숭배에 사용된 음식을 먹는 문제, 도덕 문제, 파벌 문제 등 문제들의 집합소였다.
에베소에서 이 같은 소식을 들은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에 편지를 써서 고린도교회에 보냈다. 편지가 며칠 만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궁금해도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돌아온 소식은 그리 좋지 않았고, 그는 결국 고린도를 직접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바울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들을 따끔하게 훈계했다.
에베소로 돌아온 후에도 바울의 고린도에 대한 관심은 끊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전의 문제들이 해결됐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지만, 이번엔 또 다른 문제들이 생겨났다. 바로 이단 문제였다.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교회를 휩쓸고 다니면서 성도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정체까지도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바울이 제대로 된 가르침을 전한다 하더라도 고린도교회 성도가 듣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위태로워질 것이 뻔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편지를 썼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이다.


 **바울
Paul

이름 사울(유대식), 바울(로마식)
국적 이스라엘(로마 시민권자)
혈통 베냐민 지파
저작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인맥 바나바, 브리스길라·아굴라 부부, 마가, 누가, 두기고, 빌레몬, 실라, 오네시모 등 매우 많음